숫자 하나가 한국경제에 하나의 ‘주문(呪文)’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올해 무역수지 목표 120억달러. 현실적으로 달성이 어렵다는 전망에도 불구하고 정부에서는 끊임없이 “목표 불변”이라는 사인을 내보내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숫자 놀음에 지나치게 집착, 무리한 경제기조를 낳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23일 이헌재(李憲宰) 재정경제부장관 주재로 열린 경제장관간담회에서도 경제장관들은 무역수지와 경상수지 흑자 목표인 120억달러 고수 방침이 재확인됐다. 이를 위해 2주에 한번씩 만나 부처별 실천계획을 총점검키로 했다.
재경부 관계자는 “오늘 회의에서 무역수지와 경상수지 흑자목표를 수정하는 문제는 다루지 않았다”면서 “현재로선 무역수지 목표는 변함 없다”고 강조했다.
5월초 이후 잇단 경제장관 회의에서 ‘흑자 전망치 수정 불필요’가 재확인됐다.
이같은 분위기는 정부 부서마다 수출 촉진 정책 경쟁으로 나타나고 있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는 ‘백화점 식’ 수출촉진책이 쏟아지고 있다.
특히 무역 주무부서인 산업자원부는 거의 매일 같이 회의를 하면서 수출촉진 대책을 ‘생산’하고 있다. 23일 하루에만도 ‘무역인프라 확충방안’‘기계산업 육성’ 등 흑자대책들이 나왔다.
정보통신부가 휴대전화 보조금 단말기 지급을 금지키로 한 것도 같은 배경에서다.
이같은 120억달러에 대한 집착은 무엇보다 현재 경제불안 상황에서 국제수지가 그나마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
정부의 고위관계자는 “가뜩이나 증권시장이 추락하고 해외 신인도에 이상조짐이 보이는 상황에서 국제수지 목표마저 하향조정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며 난감한 처지를 토로했다.
그러나 정부의 이같은 흑자 목표 집착에 대해서는 정부 내에서조차 많은 이견이 제기되고 있다. 경상수지 흑자도 중요하지만 무리한 수단을 동원하면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려하고 있다. 1970년대와 같이 원화 가치를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수지를 관리하면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자가 일거에 이탈할 우려가 높다. 이는 바로 주가의 추가폭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신규 외화조달도 물론 어려워진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무역흑자 하나를 갖고 다른 경제지표들을 포장하려는 의도는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개발연대에 되풀이됐던 무역수지의 숫자놀음이 재연되고 있는 게 아닌지 우려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무리한 무역수지 흑자 정책은 물가와 성장률에 무리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안정기조를 흐트러뜨려 악성 인플레를 낳을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이명재기자>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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