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준칼럼]한반도 金-金 시대의 개막?

  • 입력 2000년 6월 16일 19시 01분


공산주의자라고 하면 ‘머리에 뿔난 사람’ 정도로 인식하던 동서 냉전시대에도 서방 언론에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진 사례로 우선 월맹의 호치민(胡志明)대통령을 뽑을 수 있다. 바싹 마른 얼굴에 흰 수염이 길게 난 촌로형(村老型)의 그를 서방 언론이 ‘엉클 호’로 불러 주어 서방 사람들에게 그가 시골 아저씨처럼 친근하게 느껴지게 만들었다. 다른 사례로 중국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지적할 수 있다.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했던 프랑스 유학생 출신의 세련된 저우의 활짝 웃는 얼굴과 활달한 몸 움직임에 서방 언론인들은 매료되곤 했다. 특히 1954년의 제네바회담에서 보여준 그의 능수능란한 언행은 서방 기자들을 녹여내다시피했으며 이것은 중국의 국제적 위상을 크게 높여 주는데 이바지했다.

▼'김정일 이미지' 극적으로 반전▼

호치민이나 저우언라이와는 대조적으로 서방 언론이 싫어했던 대표적 공산주의 지도자가 소련공산당 제1서기였던 흐루시초프였다. 그가 외교적 비례를 너무나 자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크렘린궁에 초청받은 소련주재 각국 대사들 앞에서 술에 취한 상태로 “당신들이 세계적 명문대학들에서 행복하게 공부하던 시절 나는 우크라이나의 산골에서 양을 치고 있었어. 양치기의 생활, 그것은 너무나 힘들었어”라는 말로 민망하게 만들기도 했으며, 모스크바를 방문한 당시 미국 부통령 닉슨을 향해서는 “우리는 당신네 자본주의자들을 무덤 속으로 묻어 버릴 거야”라고 폭언을 한 뒤 심지어 ‘개새끼 닉슨’이라고 공개적으로 조롱하기도 했다. 유엔총회에서 연설하다가 구두로 연단을 마구 친 일, 서유럽지도자들 앞에서 “우리는 너희 수도들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어”라고 허장성세했던 일, 캄보디아 국가원수 시아누크 부부를 크렘린궁의 집무실로 불러 놓은 뒤 시아누크가 보는 앞에서 그의 부인 모니카를 유혹했던 일 따위는 그가 무지막지한 무뢰한이라는 인상을 깊이 남겼다. 그를 1964년 10월에 궁정쿠데타를 통해 축출하는데 앞장섰던 음모자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로 그가 ‘점잖지 못한 언동’으로 소련의 위신을 실추시킨 점을 꼽았던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이러한 기행의 흐루시초프에 대해 서방세계가 종전의 부정적 인상을 확 바꾸게 된 것은 1962년 10월의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였다. 그는 소련의 강경파들을 적절히 통제하면서 쿠바에 배치했던 소련 미사일을 철수시키는 ‘굴욕’의 과정을 매우 침착하게 관리했기 때문이었다. 세계를 3차대전의 위기로까지 몰고 갔던 이 사건을 합리적으로 매듭짓는 과정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 케네디는 좋은 인상을 받았고 그 결과 케네디와 흐루시초프 사이에는 오히려 믿음이 두터워져서 이른바 ‘K(Kennedy)-K(Khrushchev)시대’를 열어 갔다. 그리하여 1963년 11월에 케네디가 암살됐을 때 흐루시초프는 매우 이례적으로 주소미국대사관에 마련된 조문소를 방문하여 정중한 조의를 표했고, 1964년 4월에 흐루시초프가 사망했다는 보도가 나왔다가 곧 오보로 밝혀졌을 때 워싱턴포스트는 사설을 통해 ‘우리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세계 평화를 위해 이바지할 수 있는 정치가가 사라진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마저 가졌다’라고까지 썼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경우는 오랫동안 서방 언론에서 부정적으로 다뤄졌다. 그는 ‘자동차광(狂)’ ‘영화광’ ‘술꾼’ ‘은둔적이며 야행성의 음습한 테러리스트’ ‘무자비한 폭군’으로 비쳐졌으며 온갖 질병이 그의 이름에 연결됐다. 그런데 이번 남북정상회담의 TV 실황 중계를 통해 그의 인상은 극적으로 반전됐다. 매우 건강하고 쾌활하며 유머러스하고 예의바르며 자신넘치는 유능한 지도자로 비쳐진 것이다. 물론 TV이미지와 현실세계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으며 그 점에 대해 우리는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

▼평화통일의 큰길 마련되길▼

그러나 과거야 어떠했든 그의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새롭게 각인된 것은 그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남북한 관계의 장래를 위해 다행스러운 일이다.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개방적이며 합리적인 지도자, 최소한 ‘말이 통하는’ 지도자라는 믿음이 남한에서, 그리고 국제사회에서 공유될 때 남북한 관계는 이성적인 대화와 협상을 중심축으로 삼아 장차 많은 험난한 고비들을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어렵사리 성사된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반도에서도 ‘K-K 시대’, 곧 김대중-김정일의 ‘김-김 시대’가 열려 진정으로 화해와 협력, 그리고 궁극적 평화통일의 큰 길이 마련되기 바란다.

김학준<본사편집논설고문·인천대총장>ha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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