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양 정상은 개념상 인식의 공유가 이뤄진 용어들만 선언문에 담았다. 남북에서 사용하고 있는 모든 정치적 개념에는 전략적 목표를 담고 있다. 같은 용어라 하더라도 서로 다른 문제 의식과 방법을 내포하기 마련이다.
예컨대 ‘자주’의 경우 북한은 외세 배격과 미군 철수를 내용에 담고 있다. 남한은 우리 민족의 힘으로 통일을 성취하되 국제 협력이 필요하며, 주한 미군이 자주적 통일에 저해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그러다 보니 과거엔 공동성명이나 합의문이 채택되어도 구체적 실천과정에서 한 발짝도 진전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가장 예민하게 대립해 온 개념인 ‘자주’조차도 북한이 주한 미군 문제에 대해서 신축적 자세를 보임으로써 남북 양측이 개념 공유에 상당히 근접했다. 특정용어에 대한 개념 인식이 서로 근접했다는 것은 합의의 실천 가능성을 그만큼 높인 것이다.
물론 ‘자주’와 같은 첨예한 용어에 대해서는 아직 개념 통일을 이뤄 나가야 할 부분이 남아 있다. ‘자주’라는 원칙은 남북 어느 쪽에나 소중한 통일 원칙이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이 말에 심한 거부 반응을 보여 왔다. 그러나 이는 7·4공동성명에서 합의한 남북 공동의 작품이다. 더욱이 자주가 북한의 전용(專用)개념일 까닭도 없다. 우리도 실정에 맞는 자주 개념을 확립하고 북한과 협상에 나서야 한다. 그렇게 해서 상이한 남북의 자주 개념을 하나로 일치시켜 나가야 한다.
둘째, 남북 정상은 사상 처음으로 통일 방안의 공통성을 인정했다. 통일 방안은 그동안 서로가 한치 양보도 없이 상대방 제압 수단으로 상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안을 경쟁적으로 내놓았던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통일의 초보적 단계에 대해서 인식의 공유를 도출해 냈다. 그 공유는 북한이 자신의 연방제안을 수정함으로써 가능해졌다. 이는 북한이 그동안 한번도 공식적으로 사용한 바 없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자신의 안임을 확인한 데서 알 수 있다. 이는 북한이 현실 변화를 수용해 기존 고려민주연방제를 수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생략(省略)의 미학이다. 평화 문제와 관련해 양 정상은 많은 논의를 하고 상당 부분에서 인식의 공유를 이뤄 냈지만, 공동선언에 명기된 것은 원칙과 방향 정도에 그쳤다. 서로 의견 개진에 그친 사안과 인식의 공유가 이뤄졌어도 국제 역학이나 북한 내부 사정이 고려돼야 할 경우 생략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남측이 진지하게 설명한 핵 미사일 문제가 전자라면, 북측의 인식 변화가 확인된 주한 미군 문제 등이 후자로 보인다. 남측의 당사자 원칙과 북측의 자주적 해결 원칙을 결합시킨 제1항에서 ‘당사자 원칙’이나 ‘외세 배격’을 뺀 것도 한쪽에 명분이 되더라도, 다른 쪽에 부담이 되는 내용은 명기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반영으로 해석된다. 공동선언에서 평화 통일 관련 조항은 명기된 것보다 더 많은 논의가 이뤄졌으며 비록 공개적 합의에 이르지 못했지만 여러 쟁점에서 의견 접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공동선언은 생략의 미학이 살려진 것이다.
<세종연구소 연구위원·방북수행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