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는 13일 경제 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한나라당 권오을(權五乙)의원의 청와대를 겨냥한 ‘친북 발언’ 돌출로 여야가 고성 끝에 정회되는 등 국회 개원 이후 첫 파행이 연출됐다. 여야는 정회 직후 각각 의원총회를 열어 상대 당을 강력히 비난하며 사과를 요구해 ‘대결 분위기’가 고조됐다.》
▼민주당 의총 발언록▼
민주당 의원총회에서는 ‘친북 발언’ 당사자인 한나라당 권의원과 이회창(李會昌)총재에 대한 성토가 줄을 이었다. 일부 의원들은 “권의원을 국회 윤리위에 제소, 제명해야 한다”는 강경론까지 내놓았다. 박병석(朴炳錫)대변인은 의총 직후 열린 원내 대책회의가 끝난 뒤 “회의에서는 권의원에 대한 제명 얘기가 많이 나왔다”고 강경 분위기를 전했다. 박의원은 그러나 “절대 우리가 국회를 보이콧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 다음은 민주당 의총에서 나온 의원들의 발언.
▽서영훈대표〓청와대를 친북 세력이라고 칭하는 것은 남북정상회담을 친북 세력 및 북한 정권과의 야합으로 폄하하려는 의도다.
▽정균환총무〓‘친북 세력’ 발언은 당의 조직적 강요없이 개인 의원이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다.
▽이협의원〓통일을 위해서는 ‘분단 사고’를 뛰어넘어야 한다. 우리는 반통일 세력의 도전을 이겨내야 한다.
▽송영길의원〓한나라당은 진정으로 남북통일과 민족 화해를 바라는 정당인지, 전쟁 위기가 상존하는 냉전 체제를 바라는 정당인지 정체를 분명히 밝혀라.
▽장영달의원〓권의원을 국회 윤리위에 회부해 국회를 떠나도록 해야 한다.
▽김경재의원〓대통령 수석비서관이 ‘이회창총재는 차기 대통령을 떼어 논 당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이라고 말한 것도 잘못됐다.
▽유삼남의원〓권의원의 발언은 보수세력의 총공세의 시작일 뿐이다. 빨리 불을 꺼야 한다.
▽심재권의원〓권의원의 발언으로 지난 50년간 우리 사회를 짓눌렀던 ‘매카시 수법’이 또 나오는가 하는 생각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김희선의원〓최고의 지성은 확실한 불의에 분노하고, 그 분노를 행동에 옮겨야 한다.
▽김영진의원〓국민은 통일에 희망을 가지고 준비하고 있는데 일부 국민의 대표가 통일을 거부하는 몸짓을 보이고 있다.
▽장성민의원〓한나라당은 평화를 사랑하는 전세계인, 1000만 이산가족, 정상회담을 지지한 97%의 국민에게 사죄해야 한다.
▽김원길의원〓전선을 너무 확대해선 안된다. ‘친북 발언’을 한 권의원의 사과를 요구하는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해찬의원〓한나라당이 국회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금융지주회사법 등 산적한 현안은 처리해야 한다.
<윤영찬기자>yyc11@donga.com
▼한나라당 의총▼
한나라당은 13일 권오을(權五乙)의원의 ‘청와대 친북세력’ 발언으로 촉발된 여야 공방과 관련해 긴급 의원총회를 열고 여당과 정부를 강력히 성토했다. 의총에선 ‘때리는 북한보다 말리는 여당과 정부가 더 밉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고, 여권에 대해 ‘오만방자’ ‘악질’ 이라는 극단적 표현까지 쏟아졌다.
○…먼저 여야 공방의 불씨를 제공한 권오을의원은 자신의 발언에 대해 “일상적으로 쓰는 용어인데 민주당이 괜히 트집잡는다”고 대여 강경 정서에 불을 지폈고 한나라당 의원들은 “잘했다”며 박수로 화답.
이어 등단한 권철현(權哲賢)대변인은 “북에 끌려다니는 대북 저자세는 ‘야당 길들이기’ ‘이회창 죽이기’에 김대중(金大中)정권이 간접 참여하는 꼴”이라는 요지의 성명을 낭독한 뒤 “청와대 모수석의 발언은 견딜 수 없이 악질적인 것”이라고 격분.
박종웅(朴鍾雄)의원도 “여당이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다. 자기들이 하는 것은 통일지향이고 우리가 문제점을 지적하면 반통일분자로 몰아세우느냐”고 가세.
○…강경발언의 압권은 하순봉(河舜鳳)부총재. 하부총재는 “대통령의 그동안 행보는 의심스러운 면이 없지 않았다”고 운을 뗀 뒤 “길거리의 거지는 ‘거지’라고 부를 때 가장 싫어한다. 정당한 권의원의 발언에 여당이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는 것도 같은 이치 아니냐”고 힐난. 그는 “청와대수석의 말은 대통령의 계략이 담긴 말”이라며 “집권당의 무도한 작태에 강력히 대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창화(鄭昌和)원내총무는 “우리가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여당이 지나치게 반응한다”면서도 “민주당의 태도를 보며 적절히 대응하겠다”고 언급.
○…12일에 이어 13일 의총에서도 대북 대여 강경론이 비등한 데 대해 당 일각에서는 “부정선거 공방 등으로 쌓여 있던 대여 악감정이 폭발한 것”이라는 분석들.한편 대북문제와 관련해 ‘다른 목소리’를 내온 일부 소장파 의원들이 12일 의총에서 ‘김정일(金正日) 답방반대, 대북 경제제재’ 등을 주장하며 강경 분위기를 주도한 데 대해 “소수파인 이들이 당내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이총재에 대한) 충성경쟁을 벌이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도 나왔다.
<선대인기자>eodls@donga.com
▼統獨前 서독도 여야 갈등 겪어▼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에 대한 북한의 비난을 계기로 여야 갈등이 첨예화되면서 독일 통일 전 서독의 경우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70년 3월 ‘동방정책’의 기수 빌리 브란트 서독총리가 동독을 첫 방문, 슈토프 동독총리를 만나고 돌아온 뒤 브란트총리의 사민당 정권은 당시 야당이던 기민 기사당의 맹렬한 공세에 시달렸다.
브란트총리가 동서독 관계를 ‘특수 관계’로 규정, 동독의 실체를 인정한 데 대한 야당의 반응은 격렬했다. 브란트총리는 71년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했지만 야당은 72년4월 브란트총리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했고 사민당 정권은 겨우 2표 차로 위기를 넘겨야 했다.
그로부터 십수년 뒤인 90년. 동서독 통일이 이뤄지기 직전까지의 상황도 여야가 바뀌어 있었지만 상황은 비슷했다.
기민당의 헬무트 콜 총리는 89년 11월 베를린장벽 붕괴 직후 독일 통일 10개항을 발표하는 등 통일을 서둘렀고 야당이던 사민당은 오히려 통일 비용 과다와 실업자 양산 등을 이유로 서둘러선 안된다고 맞섰다. 통일 협상의 주역이었던 쇼이블레 내무장관은 후에 “동독과 협상하는 것보다 야당과 대화하는 게 훨씬 어려웠다”고 회고했을 정도.
독일의 통일 과정과 비교할 때 최근까지 한나라당측이 보여준 태도는 서독의 야당에 비해 매우 우호적이고 협력적인 편이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평가.
하지만 이번 북한의 이총재 비방을 계기로, 그리고 앞으로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또 다른 복병(伏兵)으로 인해 향후 여야 관계가 서독의 전철을 밟는 것 아니냐는 성급한 예측도 나오고 있다.
<이철희기자>klimt@donga.com
▼"싸워라 싸워!" 즐기는 자민련▼
‘우리는 상생(相生)의 정치가 싫다.’
13일 한나라당 권오을(權五乙)의원의 ‘청와대 친북(親北)세력’ 발언 파문으로 국회가 파행조짐을 보이자 자민련이 갑자기 희색만면하다. 이날 여야 간의 험악한 공방으로 본회의가 정회된 뒤 자민련 의원들은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앞으로는 표정관리해야 되겠네”라며 한결같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국회가 파행으로 치달으면 이를 기화로 여당 단독으로 국회 원내교섭단체 구성요건 완화를 위한 국회법 개정을 밀어붙일 수 있다는 기대감에서다. 어차피 한나라당이 국회법 개정에 찬성해줄 것으로는 기대하지 않았던 데다 그동안 민주당에 대해 “왜 한나라당에 끌려가기만 하느냐”며 ‘몽니’를 부려온 자민련으로선 호기가 왔다는 판단인 셈. 그렇지 않아도 자민련은 이날 아침 주요당직자회의에서 한나라당이 4·13총선 국정조사권 관철을 이유로 임시국회를 파행으로 몰고 갈 경우 민주당을 압박해 국회법 개정안을 단독 처리하는 방안을 모색키로 의견을 모았었다.
그러나 이같은 자민련의 기대는 일방적인 ‘희망사항’에 불과하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 민주당이 자민련의 요구에 호응해줄지도 의문인데다 당내 일각에서조차 “안되는 일에 왜 그렇게 미련을 갖는지 모르겠다”는 회의론이 고개를 들고 있는 형편이다.
<이철희기자>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