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상봉 화제]부산 장이윤씨, 北모친 생존 극적확인

  • 입력 2000년 7월 27일 18시 59분


“오마니, 진정 살아 계신단 말입네까.”

북한 적십자회로부터 남측 이산가족 방문단 후보 생사확인자 명단 가운데 유일한 생존 부모이자 최고령인 109세의 어머니 구인현(具仁賢)씨의 생존소식을 확인한 장이윤(張二允·71·부산 중구 영주1동)씨는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1929년 평북 용천군 외산면에서 7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난 장씨는 “어머님이 그렇게도 나를 귀여워하셨는데…. 돌아가신 줄로만 알고 이산가족상봉신청서에 큰형과 조카들의 이름만 써냈는데…”라며 끝내 눈물을 흘렸다.

장씨가 가족들과 헤어진 것은 중공군이 6·25전쟁에 개입해 남하하기 시작한 50년 12월5일. 그의 나이 21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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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이 평양까지 내려오면 남자들을 인민군에 징집하거나 죽인다고 했어요. 그래서 아저씨 집에서 사흘 동안 숨어 지내다 친척들과 함께 피란을 떠나며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고 어머님께 작별인사를 한 것이 영영 이별이 되었지요.”

장씨는 둘째형 문택(文澤·76년 작고)씨와 함께 친척을 따라 남하하다 대동강 넘어 10여㎞를 내려왔을 때 피란길의 혼란한 와중에서 이들과 헤어졌다. 장씨는 결국 혼자 걸어 20일만인 12월25일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 때 서울에 도착했다.

장씨는 우여곡절 끝에 형 문택씨와 60년에 만났으며 인천에서 전기용품 제조업체를 경영해 큰돈을 벌기도 했지만 60년대 말 영화제작에 뛰어들어 돈을 다 날렸다. 이후 그는 70년 부산 동구 수정동 판자촌으로 내려왔으며 부인 박순이(朴順伊·62)씨와 결혼해 2남1녀를 뒀다. 여러 사업을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던 그는 두달 전 사하구 하단동에 친척들과 함께 ‘국제주방종합유통’을 설립했다.

“현모양처였던 어머님은 막내인 나를 유독 아끼셨습니다. 여덟살 때 10리 떨어진 서당에 가기 싫다며 어머님의 젖을 빨고 나서야 서당으로 갈 정도로 어리광을 부리기도 했지요. 어머님을 만난다면 품속에 안겨 한없이 울고 싶습니다.”

반세기 만에 어머니를 만난다는 사실에 장씨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세월의 아픔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듯했다.

<부산〓석동빈기자>mobid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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