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매불망했지만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어. 그 사람이 아이들을 데리고 살아있다니.”
80세를 바라보는 백발의 노인들이 북한에 아내와 자녀들이 생존한다는 소식에 주름진 얼굴에 끝내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북한에 있는 가족 138명의 생사확인 소식이 전해진 27일 많은 이산가족들이 기쁨과 안타까움에 어쩔 줄 몰라했지만 신혼의 아내와 걸음마 자녀를 둔 채 단신 월남했던 사람들이 느끼는 회한은 남달랐다. 모두 재혼해 자녀를 둔 처지지만 가슴 한편에 쌓아두었던 북녘의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봇물처럼 터지는 순간이었다.
1·4후퇴 때 남으로 내려온 최경길(崔景吉·77·경기 평택시 팽성읍 안정2리)씨는 27일 오후 집에서 방송을 통해 자신의 가족이 북한에 살아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생시인지 꿈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생사를 몰라 애태우던 부인 송옥순씨(75)와 의관(54) 의실(52) 남매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부인 송씨는 최씨가 돌아올 날을 기다리며 재혼도 하지 않았다는 말을 전해듣고는 노안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당시 최씨는 온가족과 함께 남으로 피란 내려오다 황해도 사리원에서 유엔군을 만나면서 뿔뿔이 헤어졌다. 남자들은 의용군에 끌려가니 산으로 피신해 있으라는 말만 믿고 잠시 가족과 떨어져 있으려 했는데 그것이 영영 이별이 된 것이다.
홀로 내려온 최씨는 먹고살기에 바빠 안해본 일이 없다. 그러다 ‘이제는 틀렸구나’ 하는 생각에 6년 전 사별한 아내와 재혼해 아들 의범(46), 딸 미자(44) 남매를 두었다.
최씨의 고향은 평안남도 대동군 시종면 삼산리 평양시내. “대동강변에서 고기를 잡고 멱을 감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난번 남북정상회담 때 방송을 보니까 대동강만 제대로 있지 전혀 알아볼 수가 없게 변해버렸다”고 말했다.
최씨는 북에 있는 부인에 대해 “어느 하루도 잊지를 못했지. 그 곱던 사람이 이제는 나처럼 쭈그렁바가지가 돼 있겠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서울사는 76세 한재일씨▼
이날 북한의 가족 중 부인 김순실(金順實·76)씨와 아들 한영선(韓榮善)씨, 동생 재삼(載三·69) 재실(載實·63정도)씨, 사촌동생 재홍씨(57)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한재일(韓載一·76)씨의 첫 반응도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그리운 사람은 아들 영선씨. ‘아빠 아빠’하며 뒤를 졸졸 따르던 눈이 둥그런 아들은 네살 때 본 것이 마지막 기억이다.
“그저 껴안고 ‘그동안 어떻게 컸느냐’며 울 것 같다”고 말하는 그의 눈빛은 벌써 고향으로 달려가는 듯했다.
한씨는 평남 평원군 공덕면 산송리가 고향. 47년부터 가족을 떠나 평남 순안의 기계제작소로 들어가 목공일을 하다 6·25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50년 7월 인민군에 징집됐다.
고사포부대에서 근무하던 50년 10월경 낙동강전선까지 진출했다가 전세가 밀리자 부대장이 해산을 명령, 자유의 몸이 됐다.
이후 그는 고향을 찾아가기 위해 산을 넘으며 헤매다 지금은 기억도 안나는 경상도 어느 마을에서 현재의 아내인 소복순(蘇福順·77)씨를 만나 정착했다. 두 사람은 25년 전 서울로 이사할 때까지 보따리장사, 목공일 등을 닥치는 대로 하며 살아왔다.
소씨와의 사이에 딸 옥자(玉子·47)씨와 아들 영천(榮泉·44)씨를 두었지만 북에 남겨둔 가족에 대해서는 그리움만 안은 채 늘 그의 가슴 한편에 묻혀있었다.
현재 서울 노원구 월계동 12평짜리 임대아파트에 사는 한씨는 공공근로 등으로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한씨는 지금의 부인을 의식해서인지 북의 아내에 대해서는 “반갑다”면서도 가급적 언급을 삼갔다. 오히려 부인 소씨가 “어서 그 양반 얼굴이라도 봤으면 좋겠다”며 “다 세월 탓, 세상 탓인데 그분도 불쌍하고 나도 불쌍한 것 아니냐”며 남편에게 용기를 주는 모습이었다.
<서영아평택〓남경현기자>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