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가족 모두 사망 류순전씨▼
27일 오후 초조한 표정으로 TV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발표된 명단을 지켜보던 류순전씨(77·여·서울 강북구 수유4동)는 끝내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토록 상봉을 기대했던 두 동생 순복씨(여)와 정진씨가 모두 숨진 것으로 발표됐기 때문이다.
류씨는 특히 “아버지를 살리려고 의용군에 자원한 동생 정진이는 꼭 살아 있을 줄 알았다”며 오열을 멈추지 않았다.
황해도 안악군이 고향인 류씨가 두 동생과 헤어진 것은 1947년. 지주인데다 교회 장로였던 류씨의 아버지는 해방 직후 바로 인민군들에게 붙잡혀 감금됐다. 인민재판을 통해 사형을 당할 것이라는 소문도 자자하게 퍼져 있었고 가족 모두 공포에 질려 하루 하루를 힘겹게 지내던 터였다.
그러던 어느 날 6남매중 넷째인 정진씨가 집을 나갔다.
“정진이는 책임감이 많고 가족을 정말 사랑했죠. 처음에는 혼자 남한으로 갔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나중에 의용군에 자원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어요.”
정진씨의 소식을 전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인민군들이었다. 이들은 류씨 가족에게 “동생이 의용군을 자원하는 바람에 아버지가 목숨을 건지게 됐다”고 귀띔해 줬다. 생각 깊은 정진씨는 반동으로 몰려 사형당할 위기에 처해 있던 아버지를 살리려고 몸을 던진 것.
류씨는 1947년 감옥에 있던 아버지를 남겨 둔 채 가족과 함께 남쪽으로 떠났다. 인민군 장교와 결혼해 사상적으로 이미 ‘적’이 돼 있었던 여동생 순복씨는 피란 가기를 거절했고 나머지 3명의 형제와 류씨의 어머니가 남행을 택했다.
“1·4후퇴 때 피란을 오셔서 남한에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전에 정진이를 무척 보고 싶어하셨습니다. 우리라도 정진이를 만나 그 소식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전해 드리고 싶었는데….”
류씨는 또 “다른 사상 때문에 형제끼리 총부리를 겨눌 수밖에 없었던 순복이와도 꼭 만나 다시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우리측 상봉 신청자 중 최고령자인 이원호씨(91)는 신청 가족 8명 모두 숨졌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와 남녀 동생을 비롯, 장인 처남 등 찾는 사람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씨는 “단 한 명만이라도 살아 있어 주기를 바랐는데…”라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생사 미확인 가족 62명▼
18세 때인 1943년 아내 박삼녀씨와 결혼한 뒤 가족과 헤어진 50년 당시 아들(5)과 딸(3)이 있었던 이순선씨(81)는 27일 하루 종일 전화 앞에서 당국의 전화를 기다렸지만 끝내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했다. 북측이 통보한 명단에는 아내와 두 자녀 모두 ‘생사 미확인’이었다.
평남 강동군 봉진면이 고향인 이씨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으로 밀고 올라온 국군을 돕다가 처가인 평양에 남아 있던 가족과 헤어지게 됐다”며 “3명중 한 명이라도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싶었다”고 울먹였다.
1·4후퇴 때 국군에 입대하는 바람에 가족과 헤어진 홍경무씨(69)도 어머니와 형제 등 생사 확인을 신청한 가족 6명 모두 ‘생사 미확인’ 케이스.
홍씨는 “절대로 가족 모두가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몰라도 나보다 어린 동생들은 꼭 살아 있을 것”이라며 “북한이 포기하지 말고 이산가족의 생사를 계속 확인해 주기를 바란다”고 애절하게 호소했다.
<이완배최호원기자> roryrer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