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행정국]여야 지루한 대치 현장스케치

  • 입력 2000년 8월 2일 18시 34분


야당 초선의원인 K의원은 요즘 아침에 원내총무실에 전화를 걸어 “오늘 대기명령은 ‘낮은 단계’인가, ‘높은 단계’인가”라고 살짝 묻는다. ‘낮은 단계’는 여야간에 물리적 충돌까지는 없을 것 같으니까 그냥 대기만 하라는 신호이고, ‘높은 단계’는 한 판 붙을지 모르니 단단히 준비하고 기다리라는 신호다.

오늘(2일)은 다행히 ‘낮은 단계’였다. 그는 9시에 열린 의원총회를 마친 뒤 여당의 단독 상임위 개최를 막는 농성에 잠시 얼굴을 보였다가 곧 국회를 빠져나와 지역구로 향했다. 상황이 생기면 바로 국회로 ‘출동’할 수 있도록 ‘비상 연락망’은 열어두었다.

오후가 되면서 국회는 한낮의 뜨거운 햇볕 아래 물기 없는 식물처럼 더 시들어갔다. 여당의 국회법 개정안 날치기 처리의 여파로 국회는 개점휴업 상태. 한나라당은 오늘도 여당의 ‘날치기’ 사과 및 국회법 통과 원천무효를 주장하며 상임위 개의를 막았다.

2층 예결위원회 회의장에는 위원장석 주변에 한나라당 이재오(李在五)의원을 중심으로 야당의원 20여명이 잡담을 하고 있고, 국무위원 대기실에는 기획예산처 여성특별위원회 등에서 나온 공무원들이 소파에 앉아서 졸음을 쫓고 있다.

일주일째 국회에서 대기하고 있는 진념(陳稔)기획예산처장관은 “추경예산은 여야간 정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예결위를 안 열려면 공무원들을 보내줘야 각자의 임무에 충실할 수 있지 않느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여성특위 백경남(白京男)위원장도 “어제도 3시간 30분이나 국회에서 대기하다 허탕치고 돌아갔다”면서 “오늘은 또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느냐”고 물었다.

이날 한나라당 의원총회에 참석한 의원들은 70여명. 25명은 외유(外遊)중이고 나머지는 지역구 행사에 참석하거나 휴가를 떠났다. 민주당은 정균환(鄭均桓)총무가 의원 전원에게 대기명령을 내려 외유를 계획했던 의원들은 볼이 통통 부었다.

이런 와중에도 지역구 민원사업을 챙기는 발빠른 의원들도 있었다.

한나라당 김성조(金晟祚)의원은 ‘박정희기념관’을 자신의 지역구인 경북 구미에 지어야 한다는 청원서에, 심규철(沈揆喆)의원은 ‘태권도공원’을 충북 보은에 유치해달라는 청원서에 서명을 받으러 여야 의원들 사이를 누볐다.

마침 강남 YMCA의 초등학생 100여명이 현장학습을 위해 국회를 방문했다. 텅 빈 본회의장을 둘러본 인솔 교사는 “회기중이라서 아이들에게 본회의장에서 토론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아쉽다”고 말했다.

<전승훈기자>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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