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55돌 특집]'절반의 광복'에서 통일로… 미래로…

  • 입력 2000년 8월 8일 18시 38분


《15일은 광복 55주년 기념일이자 21세기 첫 광복절, 광복의 기쁨보다 분단의 아픔 속에 보낸 시간이 어언 반세기를 넘었다. 동아일보는 매년 8월 15일이면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고 '완전한 광복'으로서의 통일의 길을 모색하는 특집기사들을 실어왔다.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대화와 협력의 시대를 열어가는 지금, 동아일보와 8·15특집기사속에 담겨있는 광복 55년의 의미와 명암을 짚어본다.》

▼광복 직후▼

1946년 8월15일 동아일보는 1면 머릿기사에 광복의 감격을 일단 접고 ‘새나라의 첫날’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광복의 환희에만 젖을 게 아니라 앞으로의 과제를 생각해야 한다’는 게 그 골자.

사설 아래에는 ‘돌아오는 2차 식전(광복 2주년)은 새 정부 밑에서 경축하기 간망’이라는 미군정 하지 장군의 경축사가 보도됐다.

1948년에는 ‘완전 독립을 만방에 선포’라는 제목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축하했다.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은 경축사에서 “합심협력으로 함께 뭉쳐서 대내대외에 모든 장애와 풍파파란을 다 저지하여야 할 것이니…”라며 단결을 호소.

▼50년대▼

이 시절 광복 기념식은 꼭 멸공 결의식 같았다. 부산 피란 시절인 1952년 광복절에는 ‘이 벅찬 기쁨을 멸공에로, 이 교훈 살려 자주통일에 매진’이라는 제목으로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광복 10주년인 1955년에는 ‘일제의 사슬 풀리고 감격도 새로운 민족의 해방’이라는 제목으로 각종 기념 행사를 소개했다.

또 정부수립 10주년인 1958년에는 ‘건국 10년 특집’을 통해 분야별 변천사를 점검했다. 예를 들면 정부 수립 후 107명의 장관이 갈려 평균 10개월에 9명꼴로 교체됐다는 식.

다음은 기사 중 한 대목. ‘정부 수립 직후만 해도 40대 장관이 전무(全無)했지만 지금은 무려 6명이나 된다. 시대는 바야흐로 젊은이 시대다.’

▼60년대▼

5·16 후 광복절 행사가 눈에 띄게 대형화됐다. 전차와 버스는 꽃으로 치장됐고 기념식장에는 수천명의 학생들이 동원돼 성대한 행사를 벌였다.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1963년 기념식에서는 남녀중고생 100여명이 일사병으로 쓰러졌다는 뉴스가 실렸다.

1964년에는 한일 관계를 재점검하는 기획물이 실렸다. ‘사슬에서 풀린 지 19년. 환희에 가득찬 8·15로부터 2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는 동안 우리는 또 다시 불만의 여름을 맞는가’로 시작되는 이 기사는 무역적자가 1억3600만달러(1963년)에 이르는 등 갈수록 심화되는 양국 간의 불균형 문제를 집중 분석.

광복 20년인 1965년에는 미국항공우주국(NASA)으로부터 입수한 인공위성 ‘타이로스 5호’가 찍은 한반도 사진이 특집1면에 대서특필됐다. ‘우주에서 한반도를 굽어본다. 거기엔 국토를 가른 철선도 없고 겨레를 두 동강 낸 빛깔도 보이지 않는다’는 표현이 인상적이다.

1968년에는 ‘무명옷이 미니스커트로, 부정식품 공포 기승, 외형만 서양식으로 내부는 엉성’이라는 내용의 광복 후 의식주(衣食住) 변화상이 소개됐다.

▼70년대▼

1971년 시작된 남북적십자 예비회담 후 남북 화해 특집이 제작됐다. 1972년 ‘동강난 산하에 맥을 튼다’는 기사에선 ‘심지어 북한 금강산과 남한의 불국사, 한라산을 개방해 관광객을 교환하자는 얘기가 나온다’며 무르익은 평화 무드를 전달.

1973년 ‘8·15를 맞는 20대의 변’에선 지금은 대학교수가 된 오생근(吳生根·서울대) 강성학(姜聲鶴·고려대)씨의 글이 실렸다.

당시 서울대 조교이던 오씨는 “나는 정말 이광수가 변절한 작가였다고 소리높여 비난할 수 있을 만큼 떳떳이 나의 현실과 싸울 수 있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1979년 광복절 기획기사는 ‘생활속 일제잔재’를 상세히 점검. 까까중머리와 단발머리, 획일적인 중고교복, 아내에 대한 반말 등이 지적 사항. 기사는 또 ‘피부색을 알아볼 수 없도록 짙게 분을 바르는 일본식 화장을 우리가 흉내낼 필요가 있을까’라고 문제 제기.

▼80년대▼

1981년에는 만저우(滿洲) 지역 조선족 생활상을 소개하는 재미 교수 박만문씨의 기행문이 실렸다. 이 글은 ‘중공’과 교류가 없던 시절 처음으로 조선족 생활상을 전한 것.

1982년에는 ‘그 만행 그 진상’이라는 제목으로 10회에 걸쳐 일제강점기의 어두운 역사를 조명했다. 특히 생존자의 증언을 토대로 강제징용과 일어사용, 신사참배 등의 실상을 낱낱이 전해 충격을 줬다.

1987년에는 독립기념관 개관 기사가 1면 머릿기사를 차지. 전두환(全斗煥)전대통령은 축사에서 “8·15광복의 역사적인 의미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다”면서 당시의 민주화운동 열기를 반영.

1989년 남북관계와 통일문제 관련 대담에서 한승주(韓昇洲) 양성철(梁性喆) 하영선(河英善)교수 등은 “군비축소를 통해 남북평화체제의 기반을 다져나가야 한다. 역대정권의 통일의지가 국민의 열망을 따라가지 못했다”고 비판.

▼90년대▼

1991년에는 군위안부로 끌려갔던 김학순(金學順)할머니의 애절한 사연을 소개. 16세에 일군(日軍)에게 끌려가 위안부 생활 3개월 만에 탈출한 김할머니는 “내가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일본은 군위안부를 끌어간 사실이 없다 하고 우리 정부는 모르겠다 하니 말이 되느냐”며 울부짖었다.

그러나 군위안부 문제는 그 후 이렇다할 진전을 보지못했다. 1994년 ‘일본대사관앞 수요일의 절규’ 기사는 1992년 이후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소복 시위를 한 군위안부 할머니들의 메아리 없는 외침을 보도.

광복 50돌을 맞은 1995년에는 구총독부 첨탑 철거준비 작업 사진을 게재. 1999년에는 세차례로 나눠 연재한 ‘광복을 넘어서’ 시리즈에서 광복 후 협력과 갈등이 엇갈렸던 한일 양국의 ‘애증의 20세기’를 뒤로 하고 이제 새천년을 맞아 세계화와 통일을 향해 매진하자고 제안했다.

<송인수·선대인기자>is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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