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계관시인 오영재씨 연시 '아, 나의 어머니']

  • 입력 2000년 8월 17일 15시 22분


북한의 계관시인 오영재(64)씨가 헤어진지 40년만인 지난 92년 모친 곽앵순씨의 생존 소식을 듣고 사뭇치는 그리움을 시로 표현한 연시 '아, 나의 어머니'가 공개됐다.

도서출판 '살림터'는 지난 92년 재미교포들이 발간한 문집 '통일예술' 誌에 기고된 오씨의 연시를 지난 93년 펴낸 '쇠찌르레기'란 제목의 북한 우수단편선집에 부록으로 담았다.

다음은 오씨의 연시. <아, 나의 어머니>

-40년만에 남녘에 계시는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고맙습니다▼

생존해 계시니

생존해 계시다니

필순이 다된 그 나이까지

오늘도 어머님이 생존해 계시다니

그것은

캄캄한 밤중에

문득 솟아오른 해님입니다

한꺼번에 가슴에 차고 넘치며

쏟아지는 기쁨의 소나기입니다

그 기쁨 천 근으로 몸에 실려

그만 쓰러져 웁니다.

목놓아 이 아들은 울고 웁니다

땅에 엎드려 넋을 잃고

자꾸만 큰절을 합니다.

어머님을 이날까지

지켜 준 것은

하느님의 자비도 아닙니다

세월의 인정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 아들을 다시 안아 보기 전에는

차마 눈을 감으실 수 없어

이날까지 세상에 굿굿이 머리 들고 계시는

어머님의 믿음입니다.

그 믿음앞에

내 큰절을 올립니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어머니여, 고맙습니다.

▼아들의 심정▼

한해 한해 더해간

어머님 나이

이 내 가슴속에

아픈 칼 끝으로

새기며 흘러간 일흔아홉 그 나이

사흘이 멀다하게

꿈에 보는 어머니

이제껏 살아 계시리라

차마 믿을 수 없어

그런 날이면 온종일 울적한 심사

이 아들에게 기울이는

그 사랑의 힘으로 어머님은 이날까지 생존해 계시는데

어머님을 믿는

자식의 마음은 모자라

물리칠 길 없는 의혹과 불안속에 이내 생각 헤매고만 있었으니

어머님 용서하십시오

▼부르다만 그 이름▼

한밤중에 일어나

불을 켜고

다시 보는 어머니 얼굴

먼 미주를 에돌아

나에게 온 사진

어머니 없는

자식이 없건만

너무도 오랜 세월이 헝클어 버린 생각

나에게도 어머니가 있었던가

남들처럼 네게도

정말 어머니가 있었던가

열여섯에 집을 떠나

쉰이 퍽 넘을 때까지

대답해 줄 어머니가 곁에 없어

단 한번도 불러보지 못한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태여나 젖을 물며

제일 먼저 배운 말이건만

너무도 일찌기 헤어져 버린 탓에

부르다만 그 이름

세상에 귀중한 어머니란 말을 잃고

그 말 앞에선 벙어리가 되여 버린 이 자식

40년만에

이 벙어리가 입을 엽니다

어머니의 사진을 앞에 놓고

엄마!

어무니!

▼사진을 보며▼

어머니의 눈을 봅니다

바라보면 정이 흘러

내 마음과 하나로 되여 버리던

그 눈을

어머니의 손을 봅니다

쓸어 주면 따스해

내 살과 하나로 되여 버리던

그 손을

어머니의 가슴을 봅니다

얼굴을 묻으면 부드러워

내 몸과 하나로 되여 버리던

그 젖가슴을

긴 세월

마음속에 움켜쥐고 온

그 눈

그 손

그 가슴

그 누가 나에게서

어머니를 빼앗을 수 있었단 말인가

분렬세력이 아무리 장벽을 높이 쌓

아도

결코 갈라놓을 수 없는

어머니여

어머니와 나는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하나입니다

▼목소리▼

로스앤젤스와 대전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영희 회장과 어머니가 주고받은 전화

고맙게도 나에게 보내 준

그 록음테프를 풀며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귀에 익다하기엔

너무도 그 목소리 삭막해

다시 또 다시 또 듣노라면

멀리 흘러간 나날들을 되살려 주며

그날에 울리던

어머니 목소리

눈오는 창가에서

나를 업고 서성이며

나직히 자장가를 불러 주시던

그 목소리

내 홀로 밤길 걸어 집으로 올 때

어둠 속 저쪽에서 나를 찾던 목소리

생일상 차려 놓고

시루떡 냄새를 풍기며

"영재야,일어나거라"

나를 깨우던 그 목소리

아득한 세월의 장막을 뚫고

울려 오는 목소리

멀리 흘러가 버린

내 유년시절과 소년시절을

싣고 오는 소리

여닫던 고향집의 문소리와

아침 저녁 확독에 보리쌀 갈던 소리

연기 피는 아궁이 앞에서 짜내시던

그 눈물과

동백기름 내음새를

싣고 오는 소리

애써 더듬어서

드디여 찾아낸

어머니의 귀에 익은 목소리

이제는 내 한생에 다시는 지워질 거냐

더는 갈라져 살지 말자

목메여 나를 부르는

어머니 소리

통일의 해님 안고

어서 오라,어미품으로

어서 오라,어미품으로

나를 부르는

아,어머님의 목소리!

▼늙지 마시라▼

늙지 마시라

더 늙지 마시라,어머니여

세월아, 가지 말라

통일되여

우리 만나는 그날까지라도

이날까지 늙으신 것만도

이 가슴이 아픈데

세월아,섰거라

통일되여

우리 만나는 그날까지라도

너 기어이 가야만 한다면

어머니 앞으로 흐르는 세월을

나에게 다오

내 어머니 몫까지

한 해에 두살씩 먹으리

검은빛 한 오리 없이

내 백발 서둘러 온 대도

어린 날의 그때처럼

어머니 품에 얼굴을 묻을 수 있다면

그 다음에

그 다음엔

내 죽어도 유한이 없으리니

어머니 찾아가는 통일의 그 길에선

가시밭에 피흘려도 아프지 않으리

어머니여

더 늙질 마시라

세월아,가지 마라

통일되여

우리 서로 만나는 그날까지라도

(『통일예술』2집,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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