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상봉]반지 끼워주며 "꼭 다시 만나자"

  • 입력 2000년 8월 17일 19시 08분


《어떻게 하면 돌아가는 북측 방문단과 가족에게 남쪽 가족의 마음을 전달할 수 있을까. 북에서 온 부모와 아들 딸 형제 사촌 등과 3박4일 동안의 ‘짧은 만남’을 끝내고 또다시 ‘기약 없는 이별’을 앞둔 이산가족들은 17일 ‘이별의 정표(情表)’ 마련에 고심했다. 이산가족들은 미리 선물을 준비하기도 했지만 상봉을 통해 알게 된 북측 가족의 수를 감안하고 또 ‘재상봉의 희망’을 담은 정표를 건네주기 위해 이날 하루 동안 백화점 시장 등을 찾아나섰다.》

북한의 형님 민병승씨(69)와 상봉한 병하씨(53)는 17일 딸 행기씨(38)를 시켜 선물쇼핑에 나서도록 했다. 나흘 전 가까운 대형할인점을 찾아 막연하게 사이즈별로 남녀 속옷을 넉넉히 준비했던 행기씨는 큰아버지 가족들이 꼭 필요한 ‘맞춤 선물’을 정표로 하고 싶었다.

병하씨로부터 “북한의 나이 드신 형수님이 요리할 때 콩이며 마늘을 손으로 빻아야 해 힘드실 것 같다”는 말을 들은 행기씨는 북한에서 220V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믹서를 준비했다. 또 첫상봉에서 확인한 병승씨의 가족에 맞게 시계 10개, 어른용 긴팔 티셔츠 10개, 아이들용 연필 사인펜 전자계산기도 샀다.

병하씨는 “언제 다시 드릴 수 있을지 모르는데 형님 가족이 요긴하게 쓰며 나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선물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현석씨(65)의 남한 가족도 16일 1차 개별상봉장에서 우선 준비해 온 선물을 전달했다. 그러나 17일 서울의 조카며느리는 정표가 될 만한 두 번째 선물꾸러미를 다시 쌌다. 김씨의 북쪽 식구는 모두 15명. 사람 수에 맞춰 어른용 학생용 시계 15개를 구입했고 어린이용 운동화와 유아복도 아이들 키를 꼼꼼히 물어 준비했다.

경북 안동에서 올라온 김창기씨(58) 가족은 16일 밤 숙소인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 주변 약국을 뒤지며 결핵약을 구입했다. 이날 오후 개별상봉 때 형 영기씨가 “넷째아들이 결핵 기운이 있다”며 아들 걱정을 했던 점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북한 촬영감독 하경씨(74)의 형제들은 그가 최근 김일성의 업적과 관련된 내용을 사진에 담아 기록작품을 만들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필름 24통을 샀다. 아들 정기씨는 “북한에는 필름이 귀한 것 같아 준비했다”며 “이제 헤어진다니 가슴이 미어지지만 아버님이 선물을 받고 기뻐해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또 북한 최고의 화가 정창모씨(68) 가족은 고향 전주로 최고급 붓 3개를 주문해 택배로 전달받아 선물했다. 국어학자 유열씨(82)의 딸 인자씨(60)는 아버지에게 안경과 양복을 미리 맞춰 선물로 준비했다.

이 밖에 꼭 맞는 금반지를 끼워주기 위해 손가락 굵기까지 재둔 경우도 있었다. 한 적십자사 자원봉사자는 “북에서 내려온 아들을 위해 한 노모가 첫 만남 자리에서 손가락 굵기를 잰 뒤 꼭 맞는 반지를 맞춰온 경우도 봤다”고 말했다.

<김승진기자>sarafi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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