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왔던 북측 이산가족중 ‘계관시인’으로 알려져 주목을 받았던 오영재씨(64)가 15일 가족상봉 뒤 숙소에서 밤새 지었다는 시 ‘다시는 헤어지지 맙시다’의 한 구절이다. 상봉의 감격을 노래한 이 시의 시구중 ‘고려연방’은 남쪽사람들의 귀에 거슬리는 표현이다.
북측 방문단은 서울에서 ‘장군님’을 가장 많이 찾았다. ‘외세 배격’같은 표현도 적지 않았다. 이복연씨(73)는 남쪽 아내 이춘자씨(70)를 50년만에 만난 감격적인 순간에도 “장군님이 하루 사이에 그립다”고 말했다. 해주농대교수인 문병칠씨(68)는 오찬장에서 “외세는 통일하는데 필요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치색 짙은 발언은 평양에서 더 두드러졌다. 이몽섭씨(75·경기 안산시 초지동)의 북쪽 딸인 이도순씨(55)는 “우리는 장군님의 크나큰 사랑으로 살아왔다. 아버지가 장군님 품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까지 말했다.
이를 지켜봤던 남쪽가족들은 ‘벽’을 느낀 듯했다. 북에서 온 언니를 만난 김모씨는 이렇게 얘기했다.
“15일 첫 상봉에서 껴안고 통곡하다 그치자마자 언니가 ‘내가 ○○이 됐는데 이것은 모두 장군님의 사랑과 은혜로 된거야’라고 말했다. 뒷골이 당기면서 혈압이 확 올랐다. 그 뒤에도 몇차례 장군님을 찾기에 ‘위원장동지’ 정도면 되지 않느냐고 했더니 ‘위대하신 장군님’이라며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남북이 이산(離散)의 한을 씻어내면서 흘린 눈물은 똑같았다. 하지만 핏줄이 전부였던 남쪽에 비해 북쪽의 이런 발언들은 남북간에 넘어야 할 벽이 여전함을 실감케 했다. 이들의 발언은 훈련된 것이었을까. 안할 수는 없는 것이었을까.
정세현(丁世鉉)전통일부차관은 “남쪽에 가족이 있는 입장에서 신변안전장치가 필요하지 않았겠느냐”며 “시켜서 한 일은 아닐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평양의 북측기자들은 남측기자들에게 “50년 사회주의체제 아래서 교육받았고 살았기 때문일 것”이라며 “시켜서 해도 저렇게는 못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다행인 것은 85년 첫 이산가족 교환방문 때에 비해 정치적 발언의 수위나 강도가 엄청나게 약해진 것. 당시 북쪽사람들은 “수령님 덕에 모두가 잘 먹고 잘 살아 이곳(북한)은 천당이다” “분단의 주범인 미제(美帝)를 몰아내야 한다”는 식의 체제선전과 정치공세성 발언들을 서슴지 않았다.
반면 이번에는 감격적인 가족상봉을 ‘장군님’의 공으로 돌리려는 발언이 주류를 이루었고 남쪽에 대한 강도 높은 비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전문가들은 이념의 벽을 뛰어넘는데 분단의 시간만큼이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정전차관은 “위가 변해야 아래가 달라지는 북체제의 성격으로 볼 때 김정일(金正日)위원장의 ‘변화’를 아래가 쫓아가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허문영(許文寧)통일연구원기조실장은 “50년간 다른 체제에서 다른 목표를 지향하며 살아왔기에 화해하려 해도 벽을 느끼게 하는 모습들이 나타난다”면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문철기자>fullm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