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가족을 만나고 온 100명의 남측 이산가족들은 또 다른 이산의 한을 품고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서울로 돌아왔다. 18일 김포공항에 도착한 이산가족들은 평생의 한을 풀었다는 표정이기보다는 극도의 허탈감에 휩싸인 듯 했다.
세 살 때 헤어진 딸과 동생들을 만나고 돌아온 김성옥씨(72·여·대전 중구 중촌동)는 공항에서 “좀 더 주고 오지 못해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래도 혈육인지라 딸에게 보다 많은 선물을 주고 싶었지만 형제들과 올케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다 보니 마음먹었던 만큼 딸의 몫이 크지 않았다는 것.
109세 노모의 사망 소식을 뒤늦게 접하고 북에서 조카 2명만 만나고 돌아온 장이윤씨(72·부산 중구 영주1동). 공항에서 자신의 짐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금세 울음이 터질 듯한 표정으로 서 있던 그는 “너무 못사는 게 가슴이 아파…. 남에서 가족들이 온다고 남자들은 양복을 한 벌씩, 여자들도 새 한복을 입고 나왔지만 보면 모르나…. 뭐든 다 주고 오고 싶었는데…”라며 고개를 떨궜다.
형제들을 만나고 돌아온 이동선씨(72·전남 해남군 황산면)는 사진 한 장 들고 나오지 못한 가족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진다며 울먹였다. “시계는커녕 사진 한 장 들고 나온 게 없더라고…. 그러면서도 말끝마다 김정일 장군님의 은덕으로 잘 살고 있다고, 낙원이라고 하는데 뭐라 할 얘기가 없더라고….”
여생을 상봉의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야 할 노인들. 공항 청사를 나서는 이들의 표정에는 지척에 있어도 아무 것도 해줄 길이 없다는 ‘죄책감’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세 살 때 헤어진 큰딸을 만난 김장녀씨(78·여)는 “평생 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이를 내려 놓은 것 같다”고 하면서도 나이에 비해 거친 손으로 자신을 조금이라도 깊게 안으려는 딸의 손길이 맴돈다고 말했다.
유의숙씨(73·여) 역시 “평생소원이 이뤄져 두눈 감고 죽을 수 있겠다”고 했으나 “50대 초반 나이에 이마에 굵은 주름이 선명한 큰아들이 품에 안겨 응석이라도 부려줬으면 했는데 무엇인가에 신경을 쓰는지 말을 너무 가려 하는 인상을 받아 가슴아팠다”고 말했다. 남한에서 재혼한 아내가 3년전 사망한 최경길씨(79)는 치매에 걸린 옛 아내를 위해 밥도 먹여주고 휠체어도 끌어주었다. 하지만 그는 “두 번이나 아내와 고향을 등지고 떠나야 한다는 마음에 3박4일 동안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다”며 쓸쓸히 공항을 빠져나갔다.
<이훈·윤상호기자>dreamlan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