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 ‘먼 거리’와 ‘가까운 거리’가 있듯이 시간에도 ‘긴 시간’과 ‘짧은 시간’이 있다. 철마의 질주 본능을 가로막았던 20㎞의 끊어진 길은 봉동에서 신의주까지보다 먼 길이었고, 문산에서 부산까지보다도 더 먼 길이었다. 지난 주 남북의 이산가족이 만난 나흘, 그 중에서도 상봉이 이뤄진 10시간은 50여 년의 사무친 그리움 끝에 스쳐간 짧은 시간인 동시에 다시 헤어진 뒤 가슴속에 간직해야 할 영원의 시간이기도 했다. 칸트는 인간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선험적 형식을 통해 사물을 인식한다고 했지만, 우리 민족이 분단의 현장에서 느끼는 시간과 공간은 그렇게 인간의 인식이 의존할 만큼 안정된 틀을 제공하지 못하는 듯하다. 남과 북을 나누는 역사 속의 시간과 공간은 유클리드나 뉴튼의 시공간처럼 절대적이고 균질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울서 기차로 한 시간도 안 걸릴 개성은 베이징(北京)보다 멀고, 평양은 로마나 런던보다도 멀었다. 남북정상회담과 이산가족 상봉은 그 멀고 먼 개성과 평양과 신의주를 우리의 일상적 시간과 공간의 개념 속으로 끌어들였다. 정상회담과 상봉을 보며 평양은 이미 문산만큼 와 있었고, 개성 개방 소식에 개성도 이미 파주만큼 와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울서 개성 평양까지의 거리와 시간은 50년이었지만 이제는 한두 시간이 된 기분이다. 물론 경의선이 복구된다고 당장 천안 대전 오가듯 개성과 평양을 오고 갈 수는 없겠지만, 개성과 평양까지의 공간과 시간이 런던 로마 베이징이 아닌 한반도의 공간과 시간으로 회복돼 감을 느끼면서 우리는 비로소 통일의 ‘현실성’을 실감한다.
그리고 보면 이제까지 우리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남과 북의 시공간적 단절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때로는 죽기 전에 사랑하는 내 민족과 가족을 만나겠다며 그 단절을 넘어서려다가 범법자나 정신병자 또는 반역자로 낙인찍힌 이들도 있었다. 물론 그 중에는 자신이 한쪽에서 저지른 잘못의 책임을 회피하거나 개인의 영달을 위한 선택도 있었겠지만, 멀쩡한 국토와 민족을 갈라놓은 시공간의 분절을 개인의 의지로 감당하기를 기대한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
특히 공간과도 달리 돌이킬 수도 없는 시간의 단절은 뒷날에도 보상받을 수 없는 것이라 더욱 안타깝다. 시간은 언제나 모자라고 후회가 남기 마련이라지만, 이번 상봉이 이루어지던 날 이 자리에 참여하지 못한 이산가족은 물론이거니와, 50여 년을 기다렸다 만난 사람들조차 잠깐의 만남 뒤 다시 기다림의 ‘긴 시간’으로 돌아가야 했던 아픔은 너무도 잔혹한 것이었다. 어쩌면 인간이란 그저 현재의 시간만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거슬러 올라갈 수도, 앞질러 달려갈 수도 없는 과거와 미래까지 함께 안고 살아가야 하기에 그 삶의 짐이 더 없이 무거운지도 모른다.
짧은 만남 뒤 다시 긴 이별로 돌아간 그들, 이제 다시 그들의 시간은 ‘길다’. 이 기다림의 긴 시간과 공간을 아주 평범한 일상의 시공간으로 되돌려놓는 일이 남아 있다. 사실 우리의 꿈은 소박하다.
<김형찬기자>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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