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장관급회담 막판 진통…북측 제안만 합의

  • 입력 2000년 8월 31일 19시 02분


제2차 남북장관급회담 결과를 놓고 보면 북측은 ‘시혜자(施惠者)’, 남측은 ‘수혜자(受惠者)’라는 인상을 준다. 남북의 제안과 합의사항을 비교해보면 북측의 제의만 100% 담아놓은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도 이같은 회담결과의 문제점을 인식한 듯 평양에 훈령을 보내 회담을 하루 연기할 것을 지시, 31일 심야까지 공동발표문에 넣을 항목을 놓고 힘겨루기를 하는 등 막판 진통을 겪었다.

이로 인해 정부가 사전에 회담전략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 채 ‘늘어놓기’식의 제안을 했다는 ‘전략부재론’이 나오고 있다. 남측 제의 가운데 합의에 이르지 못한 사안만 해도 △분야별 위원회 구성 △군사직통전화 설치 및 군사당국자회담 개최 △임진강 수방대책 △남북직항로 개설 등 약 10개에 이른 것으로 전해졌다.

일각에서는 군사직통전화 등 군사적 신뢰회복 조치 등이 진전을 못 본 것은 북측이 군부의 반대 등을 내세워 ‘속도조절’을 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물론 합의사항을 살펴보면 이산가족 추가상봉과 남북 교차관광 등의 합의를 통해 ‘6·15공동선언’에 담은 5개항 중 통일문제를 다룬 1, 2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항목이 실행단계에 들어간다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그러나 이 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실제 회담에서는 하루하루 ‘땜질식’의 회담진행이 이뤄지고 있다는 비판이 점차 커지고 있다. 2차회담도 대표단 출발 직전인 28일 심야에야 방문경로와 일정을 합의했다. 1차회담 이후 한달간을 허송한 것.

또 70년대 이후 각종 남북회담에서 존중됐던 ‘회담장에는 어떤 표지도 하지 않는다’는 합의와 관례마저 무너졌다. 남북은 김일성(金日成)주석과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대형초상화가 걸린 회담장에서 협의를 진행했다. 정부는 이에 대해 “회담시 사진의 앵글 처리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대응을 했을 뿐이다. 게다가 서울의 회담관계자들은 “절대로 이 문제와 관련해 평양에 어떠한 형태의 훈령을 보낸 적이 없다”고 강조하는 등 북측이 문제 제기를 할 것을 우려했다.

하지만 북측이 그동안 보여왔던 태도와 비교할 때 정부측의 ‘저자세’와 안이한 태도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북한은 지난해 6월 차관급회담시 회담장인 중국 베이징(北京) 켐핀스키 호텔 바깥 국기게양대에 태극기가 걸려 있다는 이유로 2차회의부터 차이나월드 호텔로 회담장을 바꿨다.

동국대 강성윤(姜聲允·북한학과)교수는 “최근 남북관계의 진전을 보면 국제적으로 관계개선의 분위기를 띄우는 것에만 관심 있는 것 같아 보인다”며 “북측도 남측 입장을 배려하는 회담의 룰을 지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영식기자>spear@donga.com

남북제의 및 최종합의사항 비교표
남측 제의북측 제의합의사항
1.분야별위원회 구성
2.경협 제도적 장치마련(투자보장, 이중과세
방지, 분쟁해결절차, 청산결제)
3.군사직통전화 설치 및 군사당국자회담 개

4.경의선 기공식 동시진행, 문산∼개성 신규
도로 건설
5.임진강 수방 및 공동개발
6.이산가족문제 해결 확대(면회소 설치전
생사확인,서신교환,9월부터 3차례교환상봉)
7.국군포로 납북자 문제 해결
8.모든 해외동포 남북고향방문
9.휴전선통과 남북직항로 개설
10.말라리아 공동방제, 시드니 올림픽 공동입
장, 국제경기대회 단일팀 구성
1.이산가족 방문단 교환 연내 두차례 실시
2.경협 제도적 장치 마련
위한 실무회담 9월 개

3.경의선 연결 실무회담
9월 개최
4.백두산 한라산 교환방
문 (백두산 9월중순,
한라산 9월말)
1.이산가족 방문단 교환
연내 두차례 실시
2.경협 제도적 장치 마련
위한 실무회담 9월 개

3.경의선 연결 실무회담
9월 개최
4.백두산 한라산 교환방
문 (백두산:9월중순, 한
라산 9월말)
5.3차 장관급회담 10월초
서울 개최

▼朴수석-김영남위원장 대화록

박재규(朴在圭)수석대표를 비롯한 장관급회담 남측대표단은 31일 낮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김영남(金永南)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30여분간 비공개리에 환담한 뒤 1시간 40분동안 오찬을 함께 했다. 다음은 환담에 앞서 박수석대표와 김위원장이 나눈 대화 요지.

▽김위원장〓편안한가.

▽박수석〓잘 돌봐준 덕분에 잘 쉬었다.

▽김위원장〓박재규선생이 6·15공동선언 이행을 위해 남보다 애국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다시 상봉하게 돼 기쁘기 그지없다. 2차 상급(장관급)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 남녘 동포 여러분에게 반가운 마음으로 인사를 드린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건강하신가.

▽박수석〓잘 계신다.

▽김위원장〓옛말이지만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말이 있다. 어지간해서는 인생 70세까지 살기 힘들다는 말로 예로부터 내려오는 희귀한 현상이라는 표현이다. 연로하신 몸으로 북남공동선언을 이행하기 위해 분투하는 김대중대통령의 건강이 염려되기 때문에 안부부터 문의하는 것이다.

▽박수석〓김대중대통령은 연세는 70대지만 업무를 챙기고 일하는 것은 우리보다 열심히 챙긴다. 활동도 통일부장관보다 몇배 더 많이 하고 건강은 아무 걱정할 것이 없다.

▽김위원장〓(김대통령이) 동갑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건강부터 문의하는 것이다. 6월 그분과 함께 나라의 통일문제를 자주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방도에 대해 협의했다. 이는 매우 의미있는 일이며, 나는 매우 유익한 사업이었다고 긍지있게 생각하고 있다. 9월초께 나도 유엔총회에 참가하게 된다. 그때 가서 김대통령과 민족문제를 가지고 다시 이야기하게 되리라는 기대를 한다.

▽박수석〓두 분이 만든 6·15공동선언이 잘 이행되고 있다. 지난달 1차 (장관급)회담 때 회담 후 북측 대표들이 청와대에 왔다. 김대중대통령이 6·15공동선언에 대한 이행의지를 표명했다. 이것은 전금진(全今鎭)단장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마지막날 협상 막전막후

남북 대표단은 31일 ‘활짝 갠 하루’가 되리라던 당초 회담 전망과 달리 하루종일 합의문을 둘러싼 ‘줄다리기’를 계속하며 무겁고 긴박한 상황을 연출했다. 오전 공동발표문을 발표할 것으로 낙관했던 한 남측대표는 체류 일정이 하루 늘어나자 “둘째 아이 낳기가 더 쉽다고 그러는데 이번엔 난산중의 난산이었다”고 표현했다.

○…남북의 의견 차가 가장 컸던 부분은 군사 직통전화 개설 문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남측 군사분야 대표로 참석한 김종환(金鍾煥)국방부정책보좌관은 “북측 인사들과 이 문제를 두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고 언급. 이와 관련해 1차 회담 때부터 북측대표단에 이 분야 전문가가 없어 ‘북측이 군사분야에 소극적이거나 회피적인 것 아니냐’는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기도.

○…남북간 불협화음이 본격 감지된 것은 공동보도문 발표 예정시간인 오전 10시가 다가오면서부터. 발표시간이 임박했지만 최종 합의에 이르지 못한 남북 대표단은 한결같이 굳은 얼굴로 고려호텔 11층에 마련된 상황실을 들락거렸다.

남측 대표단은 상황실에서 회의를 거듭하며 서울본부와 계속 교신을 주고받았다. 2층 북측상황실에는 김영성(金靈成) 최고인민회의상임위 참사와 권호웅, 백문길 아태평화위원회 참사 등 회담 관계자들이 수시로 오가며 상황을 점검.

○…진통이 계속되면서 당초 오전으로 예정됐던 ‘북한 최고위급 인사’와의 면담도 순연. 박재규(朴在圭)수석대표를 비롯한 남측 대표단은 결국 낮 12시경에야 김영남(金永南)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만나기 위해 고려호텔을 출발.

남측 대표단 관계자는 면담자가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 아닌 김 상임위원장으로 바뀐 것과 관련해 “북측 관계자들은 김 국방위원장이 지방에 있기 때문에 김 상임위원장을 만난다고 말했다”고 설명. 하지만 회담장 주변에서는 회담이 원만히 타결되지 않아 김 국방위원장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

○…양측 대표단의 굳은 표정은 이날 낮 김영남(金永南)(金永南)(金永南) 상임위원장과 남측 대표단의 환담 및 오찬 이후 다소 달라졌다. 오후 2시50분경 고려호텔로 돌아온 양측 대표단은 호텔 로비에서 ‘결속’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밀담을 주고받았다.고 오전 내내 굳어있던 전금진(全今鎭)단장의 표정에도 미소가 감돌기 시작.

○…이날 한반도에 상륙한 태풍 ‘프라피룬’은 결과적으로 남측 회담전략 운용에 유리하게 작용. 남측이 군사 신뢰구축문제를 관철하기 위해 ‘벼랑끝 전술’을 펴는 도중 남측 대표단을 태우기 위해 오후 3시 평양에 도착한 아시아나비행기가 평양 순안비행장을 이륙할 수 없어 자연스럽게 배수진을 칠 수 있었다는 후문. <평양〓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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