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빛은행 불법대출사건과 관련해 의혹을 받아온 박지원(朴智元)전문화관광부장관에 대한 당 안팎의 퇴진론을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그동안 이같은 ‘원칙론’으로 물리쳐 왔다.
14일 민주당 당무보고 석상에서도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드러난 게 없는 상황인 만큼 조사 결과에 따라 처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경위야 어떻든 여당의 국회법 날치기 처리로 국회가 공전 중인데도 “국회법에 따라 국회가 운영돼야 한다”고만 말해 왔다.
그 사이 정국은 더 경색됐고, 민심은 멀어져 갔다. 야당은 계속 장외로 돌았고, 여권 내에서조차 특단의 조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박전장관의 사퇴가 그 뒤를 이었다. 이러다 보니 “김대통령이 민심을 너무 모르는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민주당 김경재(金景梓)의원은 19일 의원총회 후 “조선시대보다 언로(言路)가 더 막혀있다”고 푸념했다. 그는 “김대통령이 소수의 보고만 듣는 등 균형 있는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김대통령이 권노갑(權魯甲)최고위원 정동채(鄭東采)기조위원장의 보고만 듣고 있는데 이 두 사람은 같은 사이드에 있으므로 김대통령이 아무래도 원사이드한 이야기만 들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물론 동교동을 비롯한 여권 핵심 실세들은 이런 지적에 대해서 매우 언짢아해 한다.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한 측근은 “김대통령은 오랜 야당생활을 한 때문에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도 신문을 꼼꼼히 읽고 챙긴다”고 말했다. 김대통령 자신도 16일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 낙선자들과의 오찬에서 “여러 경로로 민심보고를 많이 받고 있고 또 알고 있다”고 말했다. 김대통령을 만나고 돌아온 의원들도 “대통령이 세상 돌아가는 일을 소상히 알고 있던데…”라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옷 로비사건’때는 김중권(金重權)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이 “대통령의 귀를 막은 적이 없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해 여권 내부에 미묘한 파문이 일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로와 ‘민심 파악’ 문제가 항상 거론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관계자들은 민심 파악의 통로가 단선적(單線的)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다양한 채널을 통해서, 그리고 때로는 자신과 생각이 전혀 다른 세력의 비판과 지적도 들어야 하는데 이 대목이 잘 안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민주당에만 100명이 넘는 현역의원이 있고, 과거 야당시절부터 김대통령을 추종하던 영향력 있는 인사가 수없이 많지만 과연 이들 중에 몇 명이나 대통령을 만나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있는 그대로 털어놓을 수 있느냐를 따져 보면 자명해진다.
김대통령을 좋아하고 집권과정에서 일조를 했던 한 교수(43)는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간 이래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면서 “나뿐만 아니라 대선 과정에서 함께 일했던 모든 사람이 비슷한 생각”이라고 털어놓았다.
심지어 이들 지지그룹 중에서 “대통령이 청와대에 갇혀 있어서 청와대 밖으로 끌어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서울 모 대학의 한 정치학 교수(38)는 “김대통령은 과거 야당시절 널리 인재를 구했고, 누구든 만나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회고하고 “요즘처럼 정국이 꼬일 때면 김대통령의 그런 모습이 아쉽게 느껴질 때가 많다”고 말했다.
<윤영찬기자>yyc1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