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십자회담 타결]결렬…재협상…9차례 산고

  • 입력 2000년 9월 23일 23시 49분


제2차 남북적십자회담을 통해 남북은 이산가족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향한 첫 발을 힘들게 내디뎠다.

박기륜(朴基崙)수석대표는 “이번 회담에서 ‘6·15공동선언’의 정신과 뜻을 받들어 좋은 결과를 낳았다”며 이산가족의 생사확인 및 서신교환을 준(準) 제도화하는 데진전을 본 것으로 자평(自評)했다.

그러나 이번 회담은 합의에 이르기까지 적지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남북은 합의를 위해 20일부터 나흘 동안 전체회의 1차례와 수석대표접촉 5차례, 대표접촉 3차례를 가져야 했다.

남측 대표단은 이산가족 생사확인 문제를 놓고 의견접근이 안되자 회담 결렬을 선언하는 등 그동안 북측이 즐겨 사용해 온 ‘벼랑끝 전술’을 쓰기도 했다.

회담이 이처럼 힘들었던 것은 ‘6·15 공동선언’ 이후 남북회담의 인플레 속에서 북측이 소화하기 힘들 정도로 남북관계가 빠르게 진전된 탓도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

결국 회담은, 결렬을 부담스럽게 생각한 양측이 ‘9월과 10월에 이산가족 찾기 신청자 100명씩의 명단을 시범적으로 교환한 후 규모를 확대해 나간다’는 선에서 ‘타결’의 모양새를 갖췄다. 그러나 남측이 기정사실처럼 강조했던 ‘연내 생사확인 완료’나 ‘이산가족찾기 신청자 명단 전원교환’은 슬그머니 사라져버렸다.

따라서 이번 합의는 성과가 있는 것처럼 ‘포장’됐을 뿐 사실상 알맹이가 없다는 지적도 있다. 한 예로 9월과 10월에 교환키로 한 명단은 어차피 11월과 12월에 있을 이산가족 추가 교환방문을 위해 필요한 조치이다.

남북이 이처럼 이산가족 생사확인과 서신교환문제를 놓고 ‘완전한 합의’에 이르지 못한 것은 북측 김용순(金容淳)노동당 비서와 남측 임동원(林東源)국가정보원장간의 특사회담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2차 적십자회담에서는 원래 면회소 설치 및 운영문제를 중점 논의하기로 돼 있었다. 남북은 6월30일 1차 적십자회담 때 “면회소 설치 운영 등 구체적 사항은 비전향 장기수를 전원 송환하는 즉시 (2차) 적십자회담을 열고 협의, 확정한다”고 합의했었다.

그런데 지난 14일 특사회담에서 이산가족 생사문제를 우선적으로 논의하기로 합의하면서 적십자회담의 의제도 갑자기 면회소 설치에서 생사확인 쪽으로 무게중심이 옮겨져 버렸다. 갑작스러운 의제와 우선순위의 변경으로 남북이 이를 충분히 검토할 시간을 갖지 못했던 것이 사실. 실제로 특사회담 후 남북은 5일밖에 적십자회담 준비시간을 갖지 못했다. 이는 곧 “남북대화의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거나, 정치적 결정이 앞서가면 대화 자체가 졸속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예”라는 지적들이다.

<김영식기자>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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