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베이징에서 처음 열린 통일회의는 남북관계가 경색되었던 때에도 매년 이어져왔다. 지금까지 남북간 학술교류가 대부분 일과성에 그쳤다는 점에 비춰 통일문제를 다루는 학술회의를 정례화했다는 점만으로도 남북학술사에 큰 의미를 갖는다.
남측에서는 정치학자로 구영록, 오기평, 길승흠, 안병준, 최장집, 김학준, 신복룡교수 등 중진학자들은 물론 장달중 하영선 심지연 손호철 임혁백 문정인 권만학 등 중견교수, 그리고 박명림 서동만 이종석 박건영 등 최고 수준의 전문가들이 보수에서 진보까지 고르게 참여하였다. 경제학자로는 정운찬 전홍택 조동호 박사 등이 참여하였고, 회의주제에 따라 군사 농업 관광 경제 언론분야의 전문가들이 번갈아 참여하였다. 북측은 김구식(통일문제연구소 부소장) 김철식(사회과학원 제1부원장) 박영수(사회정치학학회 위원) 원동연(사회정치학학회 부회장) 김경남(통일문제연구소 부소장) 김관기(사회과학원 참사) 최성익(김일성대 교수) 등 남북회담에 관여하고 있는 핵심인사들이 포진하였다. 해외에서는 독일의 송두율교수 미국의 이홍영 고병철 이정식 이채진 교수 등이 참여했다.
통일회의에서 다루어진 의제는 제1차 회의에서 7·4 공동성명의 3원칙(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을 복원하고, 제2차 회의부터는 남북기본합의서의 골간인 화해 교류협력 평화체제문제 등을 다루어왔다. 제3차 회의 이후는 남북협력의 실천방안으로 경제교류협력, 정치 군사적 신뢰구축, 농업구조 개선, 금강산 관광 등 세부적인 문제가 다루어졌다. 특별히 동아일보가 주관했던 1999년 제5차 회의에서는 남북관계의 거의 모든 현안, 즉 남북 경제위기(IMF사태 및 식량위기 등), 서해교전, 햇볕정책, 북한 핵 미사일, 한 미 일 공조, 남의 국가보안법과 북의 조선로동당 규약 및 형법 개정문제 등이 불꽃튀게 논의되는 ‘통일논의의 열린 광장’으로 발돋움하였다. 형식면에서 즉석토론이 활성화되고 내용면에서 토의 주제의 성역이 없어져 논의가 확장된 것이다.
방대한 자료집을 면밀하게 검토하면 우리는 요즘 현실화하고 있는 남북관계 변화의 원칙, 방향, 용어, 진전, 한계를 미리 한눈에 볼 수 있다. 즉 통일회의는 평화와 통일의 담론을 앞서 개발하고 대안을 제시해왔던 것이다. 5차의 학술회의를 통해 우리는 남 북 해외의 학자들이 직접 대면하여 논문을 발표하고, 쟁점 사안에 대해서는 예절을 갖추면서도 서로 정면으로 의견교환을 하고 있는, 통일담론의 살아있는 현장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자료집은 남북학자들이 격렬한 토론을 통해 상대방의 원칙, 입장, 정책방향을 가늠하고, 변화하는 정세에 대해 예민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점도 생생히 보여준다. 단순한 학술회의를 넘어 당국 수준에서 정책에 참고할 내용 역시 많다. 따라서 이 책은 통일도정의 한 매뉴얼로 삼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5차에 걸친 통일회의의 기조발제, 발표 및 토론내용을 살펴보면 남측 학자들은 ‘역지사지’(易地思之), ‘구동존이’(求同存異), ‘상호 실체인정’을 통한 실사구시와 실용주의적 협력을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다. 평화공존과 교류협력을 강조하면서, 냉전시대의 소모적인 대결논리에서 탈피하여 탈냉전시대에 걸맞는 평화적 통일담론을 본격적으로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북측 학자들은 페리보고서에 대한 유보적 비판적 평가와 김대중 정부 출범시 화해 협력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통일회의의 논의사항들은 오늘날 남북관계의 현실에서 많은 부분 반영되어 이 회의의 선견성(先見性)을 보여준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평화 통일 논의의 범위와 의제가 크게 확대됨으로써 이에 대한 학술논의 역시 더욱 넓어질 전망이다. 이제 남과 북의 평화 통일 논의는 평화구축과 경제공동체 형성은 물론 통일과정, 통일방안, 통일국가의 형태, 통일 후 사회경제체제 문제를 포함해야 한다. 통일회의가 앞으로 통일논의 개방을 주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평화와 통일문제에 관심이 있는 전문가와 일반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분단을 넘어 통일을 향해'/ 백영철 편/ 건국대출판부/ 1341쪽, 3만원▼
최완규(경남대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