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남한은 평화협정이 남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협상되고 조인돼야 한다고 주장해왔음에 비해, 북한은 협상과 조인이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만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둘째, 남한은 평화협정이 체결된 이후에도 미군이 남한에 주둔해야 한다고 주장해왔음에 비해, 북한은 평화협정이 체결된 이후에는 말할 필요조차 없고 체결 이전에도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이처럼 서로 대립되는 남북한 사이에서 미국은 두 가지 쟁점 모두에서 대체로 남한의 입장을 지지했으나 클린턴 행정부의 출범 이후에는 평화협정의 협상 및 체결의 당사자와 관련해 남한의 주장을 뼈대로 삼되 북한의 주장을 조화시키는 방법을 찾는 경향을 보였다.
이렇게 볼 때 우선 떠오르는 것은 6월15일의 남북공동선언문에서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전환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남북공동선언문에서는 완전히 빠진 ‘한반도 상황’의 본질문제가 북한과 미국 사이의 공동성명에서는 뼈대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문제가 결국 1차적으로 남북대화를 통해서라기보다는 이제 물꼬가 트인 북―미대화를 통해 풀려갈 것임을 뜻한다. 물론 북―미공동성명은 ‘4자회담’을 언급했다. 그러나 “4자회담 등 여러 가지 방도들이 있다는 데 대해 견해를 같이 했다”고 밝힌 것으로 미뤄 ‘4자회담’밖의 다른 방식들 역시 고려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이 실질적으로는 북―미회담이 뼈대가 되면서 남한의 참여 역시 가능한 어떤 제3의 방식을 찾으려고 하지는 않을까 주목된다.
이것을 하나의 ‘기우’라고 할 때, 다른 측면에서 긍정적인 합의들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북한의 핵개발을 동결시키기 위해 그 대가로 미국이 북한에 대한 경제원조를 다짐했던 94년의 북―미 제네바 합의의 성실한 이행이 약속된 사실, 북한의 미사일발사 포기 의사표시, 그리고 남북관계의 진전에 대한 미국의 전폭적 지지 표시 등은 11월의 대통령선거 결과로 설령 대북 강경론자인 부시 공화당 후보가 당선된다고 해도 뒤집어놓기 어려울 정도로, 북―미관계가 대결로부터 협조로 넘어가기 시작하리라는 전망을 가능하게 한다. 북―미관계의 정상화는 북한의 생존을 뒷받침할 것임은 물론 남북관계의 진전과 북―일관계의 개선을 재촉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은 ‘한반도 상황’에 관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구상이 무엇이냐는 점이다. 그는 평양에서 남쪽으로부터는 김대중 대통령을 맞아들인 데 이어 세계 최대 강국 미국으로부터는 클린턴 대통령을 맞아들여 자신과 평양을 세계적 관심의 중심무대로 만들어 놓았다. 그렇게 해놓고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이라는 본질적 문제는 미국과 협의하고 남북 사이의 교류 협력이라는 민족내적 문제는 남한과 협의하는 모양새를 취한다. 그가 어느 쪽을 먼저 답방할까? 워싱턴을 먼저 답방하고 관광명소 제주도로 찾아 올 것인가 아니면 김대통령을 먼저 만나고 워싱턴을 찾을 것인가? 그의 수순이 만들어 낼 그림이 국제사회에 어떻게 비쳐지느냐에 따라 미국과의 정상회담이 ‘메인 게임’으로, 그리하여 남북정상회담이 ‘메인 게임’에 앞선 ‘오픈 게임’으로 여겨질 수 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한반도 상황’은 평화체제의 수립을 위한 역사적 전환의 큰 조류를 타고 있음이 확실하다. 한국으로서는 북한과 미국을 상대로 할 말은 하면서 지혜롭게 대처해야 할 것이다.
김학준(본사 편집논설고문·명지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