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부 들어 대북 경협사업은 ‘정경분리’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정부는 민간의 대북사업에 대해 승인권은 갖지만 개입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사업 승인단계에서 민간업체가 낸 사업계획서의 타당성과 실현 가능성, 남북관계 개선 기여 여부만을 판단할 뿐이다. 사업수익성이나 손실보전은 정부의 고려 밖이다.
그러다보니 대북경협에 나선 기업의 피해가 속출하고 있고 대북투자 의욕도 크게 위축되고 있다. 실제로 6·15공동선언을 계기로 남북당국간 교류협력이 활성화됐음에도 불구하고 올해 민간분야 대북경협사업 및 사업자 승인은 단 3건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정부의 ‘기계적’인 정경분리 원칙 적용에 대한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다. 민간기업이 사업성을 검토하는 단계에서 정부측이 북한사회의 특성이나 북한시장에 대한 충분한 정보제공을 하지 않은 채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대처하고 있다는 것.
익명을 요구한 한 북한전문가는 “정부가 남북화해협력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북한의 시장가치를 부풀리거나 정확한 가이드라인 제공 의무를 게을리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동용승(董龍昇)삼성경제연구소 북한연구팀장은 “북한의 시장가치나 성숙도를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투자가치는 제로에 가깝다”며 “민관 합동으로 남북경협을 사전에 협의하고 검토할 수 있는 컨설팅그룹이 생겨야 한다”고 지적했다.
투자보장협정 이중과세방지협정 등 법적 제도적 ‘안전판’도 전무하다. 지난달 25일 남북경협실무접촉에서도 이에 대한 구체적 결론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법무법인 지평의 임성택(林成澤)변호사는 “현상황은 대북사업에 따른 모든 위험을 기업이 감수하도록 돼있다”며 “남북이 ‘공동재판소’를 설치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공동조정위원회’를 설치해 기업의 위험부담을 덜어주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통일부측은 이에 대해 “사업에 대한 수익성 판단은 사업자가 독자적으로 해야 한다”며 “사업실패에 대해 정부가 손실보전 등을 해주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하태원기자>scooop@donga.com
▼재계의 '볼멘 소리'▼
“기업 입장에선 ‘준조세’가 하나 더 늘어났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정부의 ‘남북경협 드라이브’에 대해 이렇게 볼멘소리를 했다.
태창의 ‘북송(北送) 내의 사태’나 통일부장관의 ‘현대차 북한공장 건립 발언’도 정부의 지나친 의욕 때문에 빚어진 부작용 내지 해프닝이라는 게 기업 측 시각이다.
재계 관계자들은 “대북 사업은 수익성이 불투명해 오너의 결단을 필요로 하는 것인데 정부가 충분한 검토 없이 대북 사업을 일단 벌이라고 주문하는 건 결국 정부 스스로 비판하고 있는 이른바 ‘황제경영’을 부추기는 셈 아니냐”고 지적했다.
현재 재계의 공식적인 대북 사업 창구는 전경련 내에 설치된 남북경제협력위원회. 여기에는 섬유 건설 고향투자 등 소위원회가 구성돼 있다.
그러나 정부는 이같은 공식라인과 별도로 주요 그룹을 개별적으로 접촉하면서 대북 사업을 ‘독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대기업 임원은 “청와대에서 종종 대북 사업과 관련해 직접 연락을 받는다”면서 “대북 사업이 어떻게 돼가느냐는 전화를 받고 나면 경영진으로선 상당한 압박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룹별 ‘지역 할당설’도 나돈다. 즉 “A그룹은 황해도를 맡고 B그룹은 함경도를 맡았다”는 그럴싸한 소문이다. 6월 남북정상회담 직후 앞다퉈 나왔던 대북 프로젝트 중 일부는 이같은 ‘압박 분위기’에서 나온 것이다.
한 주요그룹 관계자는 “6·15선언에 맞춰 대북 사업안을 급히 마련해 발표했다”고 털어놓았다.
이 관계자는 “대북 사업을 전혀 생각 안했던 것은 아니지만 1, 2년의 시간을 두고 장기적으로 검토했던 것을 정부의 대북 사업 분위기에 박자를 맞추려다 보니 부랴부랴 내놓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급히 짜낸 계획이다 보니 이 사업은 몇달이 지난 지금도 별 뚜렷한 진전이 없는 상태.
다른 한 그룹은 아무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총수의 지시로 계열사 임직원들에게 대북 사업 아이디어를 내라고 하기도 했다.
물론 이를 정부의 일방적인 압력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기업들의 입장에서도 향후 기업환경에 큰 변수가 될 대북 사업을 아예 관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부분 장기적인 투자라는 관점에서 대북 사업을 검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재계에서는 “정부의 지나친 개입은 시장 논리를 무시한 사업 추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명재기자>mjlee@donga.com
▼'태창 내의사건' 파장▼
“원사 구입비로 발행한 어음 교환시기는 닥쳐 오고, 직원들 봉급줄 돈은 없고…. 밤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태창으로부터 대북지원용 겨울 내의 90만벌(30억원 상당)을 주문 받아 제작 중인 하청업체 동성양행 김판기(金判基·49·전북 완주군 용진면)사장의 하소연이다.
그는 “주문업체의 요구로 내의에 상표도 붙이지 않아 시판도 어렵다”며 “금명간 해결되지 않으면 450억원 가량의 재고 부담을 떠안은 영세업체들의 연쇄 도산이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다”고 말했다.
동성양행은 태창측의 주문을 받고 8월초부터 12개 영세업체에 재하청을 주어 내의 60만벌을 이미 생산했고 현재 15만벌을 제작중이다. 그러나 첫 물품 인수예정일인 8월25일을 넘긴 뒤 두달이 지나도록 돈은커녕 내의 한 벌도 가져가지 않아 회사 인근의 빈 창고까지 빌려 내의를 쌓아 놓고 있다. 또 다른 하청업체인 모어패럴은 인건비 8000만원을 받지 못해 직원 20여명의 월급이 두달째 밀려있다.
이처럼 ‘태창 내의’ 파문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전북도내 업체는 400여개에 달한다. 이들 업체 대표들은 비상대책위를 구성하고 26일에는 전북 익산시 ¤태창 공장 앞에서 “영세업체 담보로 대북사업 웬말이냐”“대북사업 사기극에 전북경제 죽어간다”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태창측과 전경련은 여전히 책임 떠넘기기에 바쁘다.
전경련과 정부측은 “남북 정상회담 무렵에 대북 지원방안을 놓고 각 부처에서 의견을 제시했고, 이 과정에서 전경련측이 내의업체 관계자들을 불러 단가 등을 물어 보았을 뿐인데 태창측이 앞서서 일을 추진한 것 같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태창측은 “전경련으로부터 확실한 언질을 받고 내의 제작에 착수했다”면서 “일단 하청업체의 피해를 최소화하는데 주력한 뒤 추후에 사태의 전말을 공개할 용의도 있다”고 밝혔다.
<전주〓김광오기자>ko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