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사정 앞두고 납작 엎드린 官街

  • 입력 2000년 11월 20일 18시 40분


범정부적인 공직사정 착수와 관련, 관가에 급격한 한랭전선이 형성되고 있다. 특히 ‘이권(利權)’이 많은 부처의 공무원들은 서로 사정에 대한 정보와 전망을 주고받는 등 잔뜩 긴장하면서도 때아닌 사정한파에 불만을 터뜨리는 모습도 보인다. 또 일각에서는 이번 사정이 정권 후반기의 기강확립을 위한 ‘일회성’에 그칠 가능성도 있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전방위 공직사정의 ‘중심체’로 부상한 국무총리실은 어려운 시기에 사정의 맨 앞에 서게 된 부담 탓인지 무거운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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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동(李漢東)총리의 한 측근은 “이총리가 취임 이후 가장 무거운 지휘봉을 쥐게 됐다”며 굳은 표정을 지었고 국무조정실의 한 간부는 “집권후반기의 사정이 성공하기 쉽지 않은 것인데…”라며 총리실이 사정책임을 떠맡게 된 데 우려를 표시.

○…사정대상 ‘영순위’로 떠오르고 있는 금융감독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사정보다는 힘을 실어줘야 한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금감위 관계자는 “내년 2월까지 기업 금융구조조정을 마무리하기 위해 밤낮 없이 일하고 있다”며 “고생하는데 격려는 받지 못할망정 사정을 한다고 하면 복지부동(伏地不動)이 만연돼 일을 할 수 없다”고 불만을 털어놨다.

○…재정경제부의 한 관계자는 “현정부 들어 정부조직개편으로 ‘이권’과 관계될 수 있는 금융 인허가권과 예산업무가 다 떨어져나간 마당에 사정을 한다고 걸릴 게 무엇이 있겠느냐”며 비교적 느긋한 표정.

또 다른 관계자는 “정권 후반기에 ‘만만한’ 공무원들의 기강을 세우겠다는 의미 아니냐”며 볼멘 소리를 하기도. 상당수 공무원들은 “이런저런 소문이 무성한 권력 주변인사들에 대해 우선적으로 조사하는 것이 국민의 공감을 사게 될 것”이라고 일침을 놓기도 했다.

○…재벌기업에 대한 집중조사로 재계의 반발을 산 공정거래위원회는 그동안 공정위를 비난하는 투서가 난무해 이번에 집중적인 조사를 받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공정위 고위관계자는 “그동안 증권정보지 등에서 공정위 공무원들의 수뢰설을 퍼뜨린 사례가 적지 않았으나 자체 확인결과 모두 근거 없는 음해로 밝혀졌다”며 “속 시원히 결백을 입증하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강조.

○…해양수산부는 1조2000억원 공적자금이 투입되는 수협의 주요 간부와 해양부 관계자 등이 사정의 대상자로 꼽힐 것으로 보고 잔뜩 긴장하는 모습.

간부들은 특히 노무현(盧武鉉)장관이 국정감사에서 수협 감사자료를 제출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자료가 유출되면 검찰 수사가 착수될 수 있다”고 해명했기 때문에 사정의 불똥이 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힘있는 기관’의 분위기 파악에 나섰다.

○…정부 경제부처가 몰려있는 정부과천청사 주변 식당가도 사정관련 소문으로 공무원들의 발길이 뜸해지고 있다. 한 고급 일식집 주인은 “매년 연말은 회식 송년회 등이 많이 잡혀 있는 대목인데 사정 때문에 대목을 놓치지나 않을지 모르겠다”고 한숨.

행정자치부의 한 고위간부는 “이번 사정은 주 대상이 고위 공직자인 것으로 알려져 상당수 고위 간부들이 ‘몸조심’을 하고 있다”며 “정부 차원에서 강한 의지를 갖고 추진하는 만큼 사정 대상자가 의외로 많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공직사회 일각에서는 “사정을 통한 공직기강 확립보다 더 중요한 것은 책임 행정 문화를 확립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 한 고위 공무원은 “잘못된 정책 판단이 나라 전체를 뒤흔들고 귀중한 예산을 낭비하고 있다”면서 “일반 기업과 마찬가지로 각 공직자도 프로의식을 가져야 하며 그래야만 외압을 이겨내고 올바른 정책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

〈편집국 종합〉

▼검찰분위기와 전망…편파시비 우려 정치인사정 부담▼

청와대와 여권의 대대적 사정(司正)방침에 대해 검찰 관계자들은 20일 구체적인 사정의 성격에 대해서는 좀더 시간이 흘러야 윤곽이 잡힐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대검의 한 고위 관계자는 “21일 관계장관 회의에서 전체적인 큰 틀이 결정될 것이며 다른 사정기관 실무자들과의 논의를 거치면 이달 말경 윤곽이 정해지지 않겠느냐”고 전망했다.

이와 관련, 검찰 주변에서는 벌써부터 검찰이 현직 장관급 이상 고위 공직자의 비리를 캐는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등의 이야기도 들리고 있지만 아직은 ‘소문’에 불과한 수준.

사정의 폭과 내용에 대해 법조계에서는 검찰이 처한 여러 상황에 비춰 98년 김태정(金泰政)검찰총장 당시에 이루어졌던 것과 같은 대대적인 사정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한 변호사는 “검찰이 지금 사정할 힘이 남아있기나 하며 또 사정할 상황인가”라고 잘라 말했다. 동방금고 사건처리를 둘러싼 시비와 검찰총장과 대검 차장에 대한 탄핵안 발의 등 안팎으로 곤혹을 치른 검찰이 당장 사정의 전면에 나서기는 부담스러운 상황이라는 것.

검찰 내 ‘정보 부재’도 부정적 시각의 논거다. 실제로 검찰은 올 4월과 5월에도 대대적 사정방침을 피력했지만 지금까지 눈에 띄는 수사결과를 내놓지 못했다. 그 원인은 현 검찰의 정보력 부재가 원인이라는 지적이 많다.

야당의 편파사정론에 휘말릴 우려 때문에 정치인 사정은 더더욱 조심스러울 전망이다.

대검의 한 검사는 “수사의 단서가 되는 정보는 힘있는 여당에 대한 정보보다는 야당에 관한 것이 많기 마련”이라며 “그러나 섣불리 정치인에게 손을 댔다가는 또 한번 정치공세에 휘말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이번 사정 역시 4월처럼 관계기관들이 각자의 영역을 단속하고 검찰이 사법처리를 맡는 ‘기획사정’의 성격이 강할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물론 검찰이 최근까지 경제계 비리와 난(亂)개발 비리 등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정보’가 입수된 고위 공직자와 정치인들에 대한 수사가 본격 진행될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신석호·이명건기자>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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