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파동'으로 본 탈북자 위기감]"우리는 '한반도 미아'"

  • 입력 2000년 11월 23일 18시 34분


반세기 동안 대결과 반목으로 일관하던 남북한이 최근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열어감에 따라 국내의 북한이탈주민(탈북자)들이 극심한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다.

최근 불거진 ‘황장엽(黃長燁)파동’도 단순히 개인의 사생활 제한에 따른 반발이라기보다 남북관계 변화에 따른 탈북자들의 위기의식이 황씨를 통해 표출된 것이라는 게 대다수 전문가의 분석이다. 탈북자들의 정체성 위기의 본질과 배경 등을 살펴본다.

▼ 정체성 위기 ▼

탈북자들은 기본적으로 북한체제가 싫어 남쪽으로 넘어온 사람들. 따라서 이들이 김정일 정권을 비난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최근 정부가 북한정권의 심기를 가능한 한 건드리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국정원이 올 여름 탈북자들에게 “정부의 햇볕정책이나 북한정권에 대한 비난을 가급적 삼가달라”고 주문한 것도 이런 맥락. 과거와는 딴판이다. 따라서 탈북자들은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설 땅’을 잃어버리고 남북 양측이 모두 싫어하는 ‘한반도의 미아’가 돼버린 셈이다.

그럴수록 탈북자들은 북한 정권에 대한 비난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북한도 변하고 있다’는 정부 시각에 대해 탈북자동지회의 회보 ‘민족통일’ 최근호는 “북한이 외투만 바꿔 입은 채 여전히 적화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다”고 반박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 정체성 혼란의 배경 ▼

탈북자들과 정부의 시각차는 김정일 정권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출발한다.

탈북자들은 김정일 정권이 존재하는 한 북한이 변할 리 없다고 본다. 현 체제 하에서는 식량이건 의약품이건 정권안정에 이로울 뿐 인민들에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이에 반해 정부는 그런 냉전적 수구논리로는 남북관계의 진전을 이룰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런 이견과 갈등은 이데올로기 차원에서만 생긴 게 아니다. 남북관계의 진전이 탈북자들의 경제적 토대를 위협하고 있는 것.

당장 국정원이 주선하는 초청강연 수입이 최근 3분의 1 가량으로 크게 줄었다. 남북이 경의선 등 철로를 잇고 직교역에 나설 경우 중국 등을 통해 대북교역에 종사하는 국내 탈북자들도 일자리를 잃을 가능성이 크다.

갈수록 악화되는 탈북자들의 생활수준도 한몫 한다. 80년대 이전의 탈북자 중 69.7%가 자기 집을 갖고 있는 데 반해 그 이후의 탈북자는 8.4%에 불과하다. 탈북자들의 실업률은 60% 가량으로 국내 실업률의 10배를 웃돈다. 경제적 궁핍이 최근 불만의 근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 전망과 대책 ▼

탈북자들의 ‘극빈화’는 정부 책임만은 아니다. 정부는 97년부터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는 등 본격 지원에 나섰다. 지난해 정착금도 상당히 확대하는 등 지원을 강화했다. 고용촉진을 위해 사용자에게는 임금의 50%까지 지원한다. 그런데도 탈북자들의 상황이 별로 나아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정부의 지원 외에 남쪽 주민들의 따뜻한 동포애가 필요하다고 본다. 탈북자들이 직장에서 뛰쳐나오는 원인도 동료들의 싸늘한 시선과 따돌림 등 사소한 문제가 더 많다는 것. 일각에서는 탈북자들의 자활의지 부족도 지적한다.

서강대 김영수(金英秀·정치학)교수는 “탈북자들의 현재는 통일조국의 북한주민들의 미래상”이라며 “이들을 빨리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끌어안는 것이 탈북자들의 정체성 위기 해결은 물론 조국통일도 앞당기는 길”이라고 말했다.

<하종대·허문명기자>orionha@donga.com

▼ 탈북자들 어떻게 사나 ▼

탈북자들에 대한 공식집계가 시작된 70년대 이후 9월말 현재까지 남한으로 건너온 탈북자는 1282명. 이 가운데 사망, 이민자 218명을 제외한 1064명이 현재 남한에 거주중이다.

90년대 초까지 매년 한자릿수였던 탈북자 수는 94년 이후 두자릿수로 급증했고 올해는 188명의 북한주민이 남쪽으로 건너왔다. 이들 탈북자는 대개 통일부와 국정원으로부터 탈북관련 사실조사를 받은 뒤 ‘하나원’ 등 탈북자 보호시설에서 3개월간 사회적응교육을 받는다. 그 뒤 일반거주지로 옮기고 관할경찰로부터 2년간 신변보호를 받는다.

탈북자들은 정착금과 주거지원금, 보로금(報勞金) 등을 지원받는다. 정착금은 월 최저임금을 기준으로 최저 80배에서 최고 160배까지, 주거지원금은 최저 754만원에서 1384만원까지다. 보로금은 탈북자가 보유한 대북정보 수준에 따라 차등지급된다. 황장엽씨의 경우 보로금으로만 1억원 이상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40%에 달하는 무직자를 제외한 탈북자들의 현재 직업은 회사원(14.7%) 자영업(10.3%) 학생(6.9%) 등의 순이다. 탈북자들이 스스로 결성한 공식단체는 황씨가 명예회장인 탈북자동지회를 비롯해 숭의동지회 통일연구회 북한인자유연합회 통일복지회 승공통일중앙본부 등 6개다.

<이승헌기자>ddr@donga.com

탈북자 생활실태 비교
생활실태구 분80년대 이전80년대 이후
주거소유자 가69.7%8.4%
전월세 임대 등30.3%91.6%
재산정도5000만원 미만33.3%81.8%
5000만원 이상66.7%18.2%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