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별상봉 스케치]50년만의 잔칫상 "이제 여한없구나"

  • 입력 2000년 12월 1일 19시 54분


▼평양에서▼

상봉의 감격이 클수록 ‘내일의 이별’이 너무도 가슴 아픈 하루였다. 1일 평양 고려호텔에서 남측 방문단 100명은 북녘 가족과 개별 상봉을 갖고 이산의 아픔을 달랬지만 너무도 짧은 상봉이 아쉽기만 해 가슴은 다시 미어졌다.

○…“어머니, 환갑 진갑상도 못해드렸는데 ‘백돌상’을 올립니다.”

남측 방문단 중 최고령자인 유두희(柳斗熙·100)할머니는 이날 평양 고려호텔 공동오찬장에서 50년만에 만난 아들 신동길씨(75)가 마련한 ‘백돌상’을 받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유할머니는 아들의 큰절을 받으면서도 불편한 몸 때문에 고개만 연신 흔들 뿐 금방 입을 열지 못했다.

동길씨가 “어머니 기쁘지요”라며 자꾸 말을 건네자 유할머니는 “정말 기뻐. 이제 한을 실컷 풀었어”라며 아들의 등을 다독거렸다. 유할머니를 보살피고 있는 북측 여자안내원은 “할머니는 줄곧 ‘죽어도 한이 없다’는 말씀을 하신다”고 말했다.

한편 88세인 권오술(權午戌)씨도 같은 자리에서 북녘 딸 원희씨(66)로부터 뒤늦게나마 80돌을 기념하는 잔치상을 받았다. 원희씨는 “아버지, ‘팔갑상’ 받으시라요”라면서 술잔을 권씨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노환으로 말을 못하는 권씨는 별다른 소감을 밝히지 못하고 주위만 둘러봐 북녘 가족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고려호텔측은 1일 아침 식사로 시금치조갯국, 조개풋고추찌개, 팥죽, 닭버섯볶음, 산유(우유를 발효시킨 영양식품), 감자타래빵, 쉬움떡(술떡), 창란젓 등 10여 가지의 음식을 준비했다.

호텔 관계자는 “나이 드신 분들이 우리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편안하게 드실 수 있도록 다양한 전통 민족음식을 마련했다”며 “끼니마다 음식 종류를 바꿔가며 고루고루 맛보실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아침식사를 마친 남측 방문단은 각자 호텔방에서 개별 상봉 때 북녘 가족에게 전할 선물과 사진 등을 꺼내보거나 일부는 고려호텔 1층 매점에 들러 남녘 가족들을 위한 선물을 준비했다.

○…들뜬 마음에 밤잠을 설친 남측 방문단에 평양의 아침이 선물한 것은 한치 앞을 분간하기 힘든 ‘짙은 안개’였다.

북측 관계자는 “그동안 날씨가 좋았는데 어제부터 안개가 짙게 끼더니 오늘도 날씨가 좋지 않다”며 “86년 대동강 하구에 남포갑문이 건설된 뒤 대동강 물이 충만해져 습기가 많아진 데다 (오늘이) 겨울 날씨로는 포근해 기온차가 큰 탓”이라고 설명했다.

오전 개별 상봉을 기다리며 호텔 창 밖으로 평양 시내를 살피던 남측 방문단은 “짙게 낀 안개 때문에 어디가 어딘지 알아볼 수 없어 아쉽다”고 입을 모았다.

○…이날 평양 고려호텔 2, 3층의 공동오찬 시간은 노래자랑과 시 낭송 등이 어우러져 시종 흥겨운 축제분위기였다. 북측 가족 상당수가 만세삼창을 하는 등 ‘김정일(金正日)장군’에게 찬사를 보내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으나 남측 방문단은 이를 차분히 지켜보았다.

이날 장기자랑은 김진옥(金眞玉·81)씨의 북측 가족이 ‘고향의 봄’을 부르며 시작된 뒤 노래와 박수가 이어지면서 열기가 고조됐다.

그러나 북측의 한 가족이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배려로 50년 만에 정말 보고픈 사람을 만났다”며 ‘장군님’을 위한 만세삼창을 제안하는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북측 가족들은 열렬히 만세를 외쳤고 이어서 ‘구름 너머 그리운 장군님별께’ ‘장군님을 믿고 삽니다’ 등의 찬가를 불렀다.

○…오전 9시40분경 북녘 가족들이 고려호텔 로비에 도착하면서 남측 방문단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남북 양측은 ‘8·15 1차 상봉’ 때 엘리베이터 이동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상봉시간이 줄어들었다는 지적에 따라 이날 호텔 고층에 투숙한 가족부터 차례로 상봉이 이뤄지도록 하는 등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방문단원 가운데 최고령인 100세의 유두희 할머니는 대한적십자사 여직원과 함께 첫 밤을 지낸 뒤 객실 2008호에서 아들 신동길씨(75)에게 내복과 시계를 선물하면서 그동안 자식을 거두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다. 북측 안내원의 안내를 받으며 입실한 동길씨 등은 술과 달력 등이 담긴 선물꾸러미를 안고 있었다.

○…비행기 출발 지연으로 평양에 늦게 도착한 데다 북측 관계자들이 장충식 대한적십자사 총재의 발언에 대해 불쾌감을 내비쳐 다소 긴장됐던 30일과는 달리 방북 이틀째인 1일에는 북측의 배려로 아침식사와 오전 개별 상봉 등의 행사가 순조롭게 진행됐다.

남측 대표단 상황실은 방북자 대부분이 70세 이상으로 연로해 밤새 건강 문제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대한적십자사 담당의사 이수진씨는 “방문단에 나이 든 노인이 많아 밤새 20∼30차례 객실을 오갔으나 뚜렷하게 큰 이상을 보이는 환자는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부형권기자·평양〓공동취재단>bookum90@donga.com

▼서울에서▼

1일에는 서울을 찾은 북한측 이산가족 상봉단원들이 남쪽의 가족들과 보다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개별상봉 기회를 가졌다. 서로 잊고 있었던 옛기억들을 하나하나 확인해나가며 ‘50년의 빈 틈’을 메워나간 이들은 짧은 만남에 긴 이별을 예감한 듯 대부분 울음으로 만남을 마무리했다.

○…북측 이산가족 방문단은 개별상봉에서 재남 가족들에게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 명의의 동일한 선물세트를 전달.

선물세트는 백두산 들쭉술 2병, 2001년 새해 달력 2개, 보드카 3병, 침대 시트 1벌과 조선노동당 창건 55돌 경축 횃불행진 녹화 비디오테이프 등으로 꾸며졌다.

선물세트에는 또 여과(필터)담배 1보루, 왕재산경음악단 노래 테이프 등과 김위원장이 지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조국통일 유훈을 철저히 관철하자’ ‘3대 장군 위인상’ 등의 서적도 들어 있었다.

○…개별상봉 장소인 롯데월드 호텔에는 상봉시간 2시간 전인 오전 8시부터 가족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남측가족들은 9시30분 3층 크리스탈볼룸에 모여 간단하게 인적 확인을 하고 다섯 가족씩 조를 이뤄 북측 방문단의 방으로 이동. 그러나 이들이 이용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단 2대뿐인 데다 상봉이 허용된 가족 당 5명 외에 다른 친지들까지 안타까운 ‘틈새 상봉’을 기대하며 로비에 몰려 개별상봉이 다소 지체.

○…“저희 할아버지께 이 편지를 전해주실 분 없으신가요.”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 호텔 32층 식당 ‘라세느’의 지배인 송시우씨(40)는 아버지 선주씨(67)가 북에 살아 계실지 모르는 자신의 아버지이자 시우씨의 할아버지에게 쓴 편지 한 통을 들고 이날 아침 식사를 하러 온 북측 방문단원들에게 일일이 호소.

편지에는 북에 남기고 온 부모 동생들에게 미안하다는 절절한 사과와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시우씨는 “북에서 오신 분들을 할아버지와 삼촌처럼 생각하며 정성껏 식사를 준비했다”고 말하기도.

○…1일 개별상봉이 이뤄진 서울 잠실 롯데월드호텔에는 이산가족을 찾아주겠다는 40대 중반의 여성 ‘이산상봉 브로커’가 출현해 눈길.

자신을 러시아 국적의 조선족 여인이라고 밝힌 이 여성은 “이렇게 정부를 통해 만나는 것보다 사할린에 있는 우리 회사를 통하면 더 쉽고 자유롭게 만날 수 있다”며 상봉 현장 부근의 남측 이산가족들에게 접근.

그는 “북측도 남쪽 정부보다는 나를 더 신뢰할 것”이라며 자신의 한국 연락 전화번호 등이 적힌 명함을 돌리기도.

<서정보·전창·최호원기자>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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