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ile&Politics]"은둔서 해방" 김정일 말솜씨 화제

  • 입력 2000년 12월 28일 18시 55분


남북 정상회담 개최로 올 한해 남북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당국간 대화가 정착됐고,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다. 정부는 “화해와 협력의 새 기반이 조성됐다”고 평가했다. 반세기에 걸친 대립과 불신을 씻어내는 과정에서는 말들도 많았다.

정상회담을 위해 6월13일 평양 순안공항에 내린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인사말을 통해 “남녘 동포의 뜻에 따라 민족의 평화와 협력, 통일에 앞장서고자 평양에 왔다”고 말했다. 남북관계의 급진전을 예고하는 역사적인 말이었다.

▼"셰익스피어도 글로 못쓸것" 두차례 상봉 감격의 눈물▼

정상회담을 통해 스타가 된 사람은 역시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 김국방위원장은 백화원 영빈관에서 열린 1차 정상회담에서 김대통령에게 “힘들고 무서운 길을 오셨습니다” “자랑을 앞세우지 않고 섭섭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김대통령이 오셔서 은둔에서 해방됐다고 그래요”라는 등의 재치 있는 말로 그에 대한 서방의 인식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는 더 이상 은둔자가 아니었다.

그의 순발력 있는 언변은 남측 언론사 사장단의 방북 때에도 이어졌다. 그는 사장들에게 “우리 군대가 전쟁 때 낙동강까지 갔었는데 집집마다 동아리에 막걸리가 있어서 두세 사발씩 먹고 비리비리하는 바람에 전쟁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8월12일)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15년 만에 남북의 이산가족들이 서울과 평양을 두 차례 방문했다. 북측 방문단으로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어머니를 상봉한 조진용씨는 “셰익스피어가 살아 있어도 이런 비극적인 삶을 다룬 글은 쓰지 못했을 겁니다”라며 이산의 아픔을 대변했다.

당국간 대화도 정례화됐고 분위기도 좋았다. 남북장관급회담 남측 수석대표인 박재규(朴在圭)통일부장관은 1차회담이 열린 7월30일 전금진(全今振)북한 내각 책임참사에게 “남북합작 영화를 만들어 둘이 주연을 맡자”고 말할 정도였다.

김용순(金容淳) 북측 특사를 비롯한 북측 대표단의 잇단 제주행도 눈길을 끌었다. 국방장관회담(9월25∼26일)에 참석한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은 오르막길에 차가 올라가는 것으로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제주도 ‘도깨비 도로’에서 “지구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얘기니까 진짜 문제가 된다”며 과학실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남북합작영화 주연 맡자" 당국간 만남 50년냉전 해빙▼

남북관계가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남측에선 “정부의 대북정책이 북측에 의해 끌려다니고 있고 이면합의 의혹마저 있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그 연장선상에서 정상회담 특사였던 박지원(朴智元) 전 문화관광부장관이 야당 공세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박 전장관은 10월7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나와 “제가 ‘내곁에 있어주’를 잘 부릅니다”고 자신의 애창곡을 소개해야만 했다. 민주당 장성민(張誠珉)의원이 “(정상회담 당시 북에서) ‘내곁에 있어주’를 부른 것은 김국방위원장 곁에 있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냐”고 물었기 때문.

▼"장총재 죄에 죽고 재생해야" '북 고자세 남 저자세' 잡음▼

박 전장관은 답변에서 “6·15 공동선언후 분위기가 좋은 상황에서 김국방위원장이 노래를 하라고 해 우리 민족의 오랜만의 만남을 생각하며 불렀다”면서 “게다가 남한 책에는 외래어가 많다고 했던 김국방위원장 자신이 ‘앵콜, 앵콜’하는 바람에 한 곡 더했다”고 설명했다.

북측의 독설이 남측 적십자사의 내분을 조장하기도 했다. 장재언(張在彦)북한적십자회 중앙위원장은 12월2일 장충식(張忠植) 한적총재의 ‘북한 비하발언’을 문제삼아 “장총재는 죄에 죽고 올바르게 재생해야 한다”고 비난했다. 이 비난으로 장총재는 끝내 사퇴했다.

전에 없는 화해와 협력 분위기 속에서도 남북관계는 말 한마디에도 원점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만큼 아직은 취약하고, 그래서 언제나 조심스럽게 다뤄 나가야 함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김영식기자>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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