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는 68년 김신조일당의 1.21 청와대 습격사건과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69년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으로 남북간이 극도의 긴장상태에서 여러 형태의 침투, 납치사건이 빈발했던 시절이었다.
사건이 일어난지 66일만인 70년 2월 14일 승객 39명은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그러나 승무원 4명 전원과 승객 8명은 북에 남게 됐고, 이들의 가족들은 납북 KAL 미귀환자 가족회 를 만들어 활동해 왔으나 2,3년뒤 당국의 미온적 반응과 무관심 등으로 인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미귀환자는 기장 유병하, 부기장 최석만, 여승무원 성경희(成敬姬) (鄭敬淑), 승객 채헌덕(蔡憲德) 장기영 임철수 황원 김봉주 이동기 최정웅 조창희씨 등 12명. 이중 64년 서울 창덕여고 졸업 동기동창인 여승무원 성, 정씨는 북한에서 결혼했고, 북한의 대남방송인 구국의 소리 어나운서로 활동해 온 사실이 92년 자수한 간첩 오길남씨에 의해 확인됐다. 그러나 기장 유병하씨 등 다른 납북자들의 소식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납치범에 대해서 당시 치안국은 "북괴의 고정간첩이며 강릉에서 자혜병원을 경영하던 승객 채헌덕(당시 38)이 주범으로서, 다른 승객 조창희(趙昶熙)와 부조종사인 최석만(崔石滿)을 포섭해 비행기를 납북해 갔다" 고 발표했다.
그러나 조중훈(趙重勳) 당시 KAL사장은 그해 12월 15일 기자회견을 갖고 "최석만의 가정과 과거 생활태도로 보아 간첩행위를 할만한 결정적 단서가 없다" 면서 따라서 경찰의 발표는 단순한 추정일 뿐 이라고 말해 사건의 정확한 진상은 지금까지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이철희기자>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