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반세기 만에 만난 오빠와 누이는 아버지가 남긴 시 ‘향수(鄕愁)’를 함께 낭송하며 덧없이 흘러간 세월의 아픔을 달랬다.
6·25전쟁 때 납북된 것으로 알려진 아버지 정지용(鄭芝溶)시인의 셋째아들 구인(求寅·67)씨를 만난 남쪽의 형 구관(求寬·73)씨와 여동생 구원(求苑·66)씨는 “아버지 찾으러 나갔다가 이제야 오느냐, 돌아가신 어머니가 꼭 보고 싶어했는데…”라며 통곡했다. 당시 배재중에 재학중이던 구인씨는 아버지가 행방불명되자 “아버지를 찾으러 간다”며 집을 나간 뒤 연락이 끊겼던 것.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찾으러 온 가족이 나섰다가 그만 구인씨마저 연락이 끊겼다. 이 때 구인씨의 둘째형인 구익씨(70)도 함께 행방불명됐다.
정지용 시인은 6·25 발발직후인 50년 7월 교직에서 물러나 서울 녹번동(옛 경기도 녹번리) 자택에서 글읽기로 소일하던 중 후배, 제자 문인들과 함께 집을 나간 뒤 실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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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에서 방송기자로 일하고 있는 구인씨는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해 “10여년 전 쯤 통일신보에 박상수 시인이 아버지의 삶에 대해 쓴 글에 따르면 아버지가 북으로 가던 중 경기도 동두천 소요산 기슭에서 미군 비행기의 기총탄을 맞고 숨을 거둔 것으로 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는 1920년대 창작시인으로 카프(KAPF)작가나 혁명적 시인도 아니었는데, 고전적 주체문학론을 수립한 김정일(金正日)장군이 김소월과 함께 애국적 시인으로 평가해 최근 이북에서도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형 구관씨는 “내년에 아버님 탄생 100주년을 기해 중국 옌볜(延邊)에 아버지의 시비를 세울 예정”이라며 동생 구인씨에게 ‘정지용 문학전집’과 ‘향수’등의 시를 노래로 만든 카세트 테이프를 선물했다.
<전승훈·박윤철기자>raphy@donga.com
▼94세 어머니 만난 이후성씨▼
“엄마, 인수아버지 왔어요.”
이후성씨(76)의 어머니 장오목씨(94)는 50년 만에 장남이 돌아왔다는 소리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채 한동안 먼 곳만 쳐다보았다. 애초 북측에서 어머니가 생존했다는 사실을 통보해왔을 때 ‘거동 못함’이라는 표시가 되어있을 정도로 노환에 시달리고 있는 어머니.
휠체어를 타고 상봉장에 힘겹게 나왔지만 아들이 왔다는 소리조차 알아듣지 못한 어머니의 주름살은 너무도 깊게 패어있었다.
자신의 품에 뛰어들어 “오빠 왜 이제 왔어요”라며 울부짖는 여동생과 아들, 처를 껴안는 이씨의 눈가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어머니 어떻게 나오셨어요. 안나오실까봐 걱정했는데…”라고 말하는 이씨는 아직도 생생한 50년 전의 그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황해도 평산군 안성면이 고향인 이씨는 7남매의 맏이로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징병에 대한 압박과 시달림 속에 51년 1·4후퇴 때 다섯 살에 불과한 아들과 가족을 뒤로한 채 “3일뒤에 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단신으로 얼어붙은 임진강을 건넜다.
남측에서 30여년간 미군 군속으로 일해온 이씨는 전쟁이 끝난 뒤 갈 길이 막막해졌다. 55년 박계자씨(74)를 만나 2남3녀를 두었지만 북에 남은 가족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북측 가족들 얘기를 되풀이해 남쪽 가족들이 이씨의 가족사를 훤하게 알 정도였다.
7년 전 중풍으로 쓰러진 뒤 지금도 갖가지 병으로 고생하는 이씨는 혼자서 운신이 어려운 상태. 서울에서 평양으로 올 때도 휠체어를 타고 이동했고, 평양에서는 휠체어를 타고 나온 어머니를 만났다.
“제가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데… 얼마나 고생하셨어요.” 이씨의 외마디 통곡을 알아들은 것처럼 어머니 장씨의 눈에서도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평양〓공동취재단>
▼집단체조 대가 김수조씨…이념찾은 北삼촌 정 못느낀 南조카▼
평양 5·1경기장의 10만 군중을 한치의 빈틈도 없이 지휘했던 ‘집단체조의 대가’는 50년 만에 만난 조카들 앞에서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이에 비해 당당한 체구를 자랑하며 늠름하게 상봉장에 들어온 북한 피바다가극단 총장 김수조(金壽組·69)씨는 김복겸(金福謙·52·서울 은평구 신사동)씨를 비롯한 이모와 조카들이 눈물을 글썽이자 “앉자 앉자”하며 달랬다.
수조씨는 복겸씨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형이었던 수희(壽喜)씨의 안부를 담담하게 전했다.
“네 아버지는 99년에 돌아가셨지만 큰일을 하셨다.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으셨고 평양연극영화대학 텔레비전 학부 방송화술 강좌장을 하셨다.”
그러면서 수희씨가 자식들에게 전해주랬다던 붓글씨 작품을 조카들에게 건네줬다. 하지만 그 내용이 ‘대를 이어 위대하신 수령 어버이께 충성해야 아버지가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겠다’고 끝나자 순간 분위기는 어색해졌다.
이어 수조씨는 “지도자 동지의 큰 은공으로 영웅이 된 내가 석달 전부터 남에 있는 너희들을 생각하며 키운 것”이라며 3개의 종이상자에서 ‘김정일화’라는 꽃이 담긴 화분 3개를 꺼내 조카들에게 나눠줬다.
수조씨는 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 집단체조 연출을 마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같이 “위대한 장군님 만세”를 부르자고 했지만 조카들은 어색한 얼굴로 서 있을 뿐이었다.
결국 수조씨는 혼자 “위대한 장군님 만세”를 불렀고 손을 맞잡고 있던 조카들은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한 채 물끄러미 삼촌의 얼굴을 쳐다봤다.
지난해 조선노동당 창당 50주년 기념 집단체조를 연출해 ‘공화국 영웅’칭호를 받았던 수조씨였지만 이 순간 조카들에겐 자상한 삼촌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완배기자>rorire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