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정신을 되돌아본다]"人治에 밀린 法治"

  • 입력 2001년 7월 17일 19시 01분


김대중(金大中) 정부가 출범 때 내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제헌 헌법부터 현행 헌법(9차 개정헌법)까지 일관되게 유지돼 온 헌법의 기본원칙이다. 하지만 현 정부 출범 후 3년반 동안의 국정운영 과정에서 이런 기본원칙이 상당히 훼손돼 왔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많다. 제53회 제헌절을 맞아 현 정부가 헌법의 기본정신과 원칙에 얼마나 충실했는지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를 들어본다.

▽자유민주주의〓연세대 최평길(崔平吉·행정학) 교수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는 가운데 합의점을 찾는 것이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인데 김 대통령이 이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보이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말했다.

최 교수는 “김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계승하려는 것인지 확실히 하지 않으니 포퓰리즘 소리를 듣는다”고 덧붙였다.

연세대 허영(許營·법학) 교수는 “우리 헌법에서 통일은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수단에 불과한데, 이 정부는 거꾸로 통일을 우선시하는 듯하다”며 “자유민주적 가치조차 양보할 수 있는 것처럼 나가는 것은 기본적 가치질서를 뒤엎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허 교수는 “자유민주주의 하에서의 평등 개념이 왜곡되고 있다”며 “특히 교육정책의 경우 성취욕구를 저하시키고 교실 붕괴를 가져오는 하향식 평준화는 사회주의의 실패에서 보듯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숙명여대 박재창(朴載昌·행정학) 교수도 “민주주의의 이상은 자유와 평등의 조화인데 현 정부가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평등에 치중함으로써 자유와 평등 간에 긴장이 심화됐다”고 지적했다.

▽권력분립〓고려대 김일수(金日秀·법학) 교수는 “대통령 말 한마디에 의회와 당정이 움직이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적인 방식이 아니다”며 “아직 ‘제왕적 통치’라는 말이 있다는 얘기는 권력분립 원리의 훼손이 존재한다는 뜻이다”고 말했다.

그는 또 “언론사 세무조사와 관련한 요즘 일들이 ‘빈대를 잡기 위해 초가삼간 태우는’ 과도한 권력행사”라며 “과도한 권력작용이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고 있는 것 자체가 헌법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최평길 교수는 “김 대통령이 견제세력 없는 제왕적 대통령이 되고 있다”며 “이는 투명하지 못한 김 대통령의 개인적 성격에 기인한 것이어서 임기 끝까지 돌이킬 수 없는 문제로 본다”고 말했다.

▽법치주의〓숭실대 서병훈(徐炳勳) 교수는 “권력에 의해 법이 휘둘리고, 법이 자의적으로 집행되는 현상이 이전 정권보다 더욱 심하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며 민주당과 자민련 간 ‘의원 꿔주기’를 대표적 사례로 들었다.

서울대 홍준형(洪準亨·공법학) 교수는 헌법재판소가 내부적으로 위헌평결을 내린, 지난해 국회법안 날치기 처리를 반(反)법치주의 행태 사례로 꼽았다.

연세대 송복(宋復·사회학) 교수는 “언론사 세무조사의 경우 법이라는 객관적 잣대가 아니라 사람의 호오(好惡) 감정에 따라 진행된 게 문제”라며 “우리 헌정사에서 인치(人治) 중의 이런 인치가 없다”고 지적했다.

허영 교수 또한 “법의 지배가 약화되고 사람에 의한 지배가 강화되고 있는 점이 김대중 정권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말했다.

▽시장경제〓전문가들은 정부의 경제정책 가운데 시장경제원리에서 벗어난 사례로 △정권 출범 직후 정부 주도로 이뤄진 빅딜(대규모 사업교환) △업종 특성을 무시한 부채비율 200%의 획일적 적용 △출자총액제한제도의 부활 등을 들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 조성봉(趙成鳳) 연구위원은 “정부의 역할이 법과 제도가 정한 범위 내에서 엄격하게 이뤄져야 하는데 실제로는 정부가 자의적으로 끼어들 여지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전경련 관계자는 “어떤 기업이 죽느냐 사느냐를 결정짓는 것은 시장의 몫이지만 지금까지는 정부가 기업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던 게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홍준형 교수는 “93년 국제그룹 관련 위헌소송에서 과도한 정부개입이나 반법치주의적 개입이 돼서는 안된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런 결정이 다시 내려질 만한 사안이 많다”고 말했다.

김일수 교수는 “한국관광공사를 통해 금강산관광사업에 남북협력기금을 지원하는 것은 민간부실을 정부와 국민이 떠맡는 것으로 시장질서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문철·박원재기자>fullmoon@donga.com

▼"독단적 통일정책 헌법정신에 위배"▼

원장길(元長吉) 제헌의원동지회장은 17일 제헌절 경축식에서 기념사를 통해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의 정통성이 역사상 정치적 법률적으로 미흡한 상태에 있다”며 “신속히 합법적으로 정통성을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

원 회장은 연설 후 “헌법 제4조에 통일정책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질서에 따라 하도록 명시돼있는데 지금 정부는 이러한 헌법정신을 어기고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원 회장은 또 “정부가 국회의 동의나 승인 없이 독단적으로 통일정책을 펴고 있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근본적인 절차를 위반하는 것이며, 6·15공동선언문에도 헌법 제4조의 정신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으므로 부적절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원 회장은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은 공산주의식으로 통일하려고 하는데 결국 우리 정부가 이에 동조하는 양상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며 “남북협상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를 통해 구성된 이 나라를 주축으로 해서 하라는 것이며, 북한도 선거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면 (동등하게) 받아줄 수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여권 "모두 법률에 근거"▼

민주당 전용학(田溶鶴) 대변인은 “현 정부가 했던 모든 국법상의 행위는 국법상 법률에 근거해서 하는 것”이라며 “이를 두고 법치주의 위반이다, 뭐다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지적”이라고 말했다. 정세균(丁世均) 기조위원장은 “재산권, 결사의 자유, 언론 자유 등 헌법에 보장하는 기본권이 현재 어느 수준이냐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역사적으로 과거에 비해 기본권과 자유의 신장은 그 어느 때보다 현저한 게 사실 아니냐”고 말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과거에는 (권력이) 초법적으로 하던 것을 지금은 정부 기관들이 자율권과 책임을 갖고 스스로 하고 있다”며 이 정부 들어 개선된 점을 평가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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