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정부 국정진단 초심과 현실]남북관계

  • 입력 2001년 8월 26일 18시 41분


《말 그대로 난국(亂國)이다. 97년 12월9일 아침, 김대중(金大中) 대통령당선자가 내놓았던 ‘대동단결’ ‘국민화해와 통합’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 등 갖가지 다짐이 한낱 구호가 돼버렸지 않았느냐는 우려가 크다. ‘사회해체’ ‘심리적 내전(內戰)상태’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올 만큼 나라 사정이 어지러워진 게 오늘의 현실이기도 하다.


건국 이래 처음으로 선거를 통한 여야간 정권교체를 이룩해 나라 안팎의 기대를 모았던 김 대통령이 취임한 지 3년반. 어찌하다 나라가 이 모양이 되고 말았는가. 모두 다시 초심(初心)으로 돌아가 찢어진 곳을 꿰매고, 무너진 곳을 일으켜 세우고, 뒤틀린 곳을 바로잡을 길은 정녕 보이지 않는 것인가. 이제 김 대통령이 남은 임기 1년반 동안 심기일전해 새롭게 챙기고 가다듬어야 할 주요 국정과제가 무엇인지 점검해보고, 그 처방을 찾아보는 시리즈를 게재한다.》

▼싣는 순서▼

- ①남북관계
- ②국민화합
- ③相生정치
- ④시장경제
- ⑤사회개혁
- ⑥언론자유

평양 ‘8·15 민족통일대축전’ 참가자들이 귀환하던 21일. 이들을 맹렬히 규탄하는 보수단체와 환영하는 진보단체가 오랜 세월 동안 목격하기 힘들었던 물리적 충돌까지 빚은 이날의 김포공항은 우리 사회 내부에 잠재된 이념갈등이 적나라하게 표출된 현장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사건’은 현 정부 대북정책의 금과옥조인 ‘햇볕정책’ 전도사 임동원(林東源) 통일부장관이 야당은 물론 여권 일부로부터도 사퇴압력을 받는 혼란상의 빌미가 되고 말았다. 특히 야당으로부터 ‘국적불명의 대북정책’ ‘전력(前歷)이 불투명한 무자격장관’이라는 극언이 나올 정도로 상황은 심각하다. 김 대통령이 나라 안팎의 지지를 받으며 추진해온 ‘햇볕정책’이 집권 이후 최대의 시련을 겪고 있는 것이다. 어찌하다 이런 상황까지 벌어지게 됐을까.

▼졸속, 과속의 대북정책▼

김 대통령은 취임사(98년 2월25일)에서 “남북관계는 화해와 협력 그리고 평화정착에 토대를 두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담담하게 대북정책의 기조를 밝혔다. 2000년 6월15일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기까지 남북관계는 차관급회담의 두차례 결렬이 전부라고 할 정도로 정부의 접근자세는 조심스러운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김 대통령 5년 임기의 꼭 중반 무렵에 열린 남북정상회담의 영향은 남북관계는 물론 국정전반에 미칠 만큼 질풍노도(疾風怒濤)처럼 휘몰아쳤다.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 평화정착의 가능성을 보여준 정상회담은 ‘세기적 드라마’로 손색이 없었다. 또 그 자체로도 의미가 큼은 물론 각종 당국회담과 이산가족의 잇따른 만남 등 가시적인 성과의 원천이 됐다.

하지만 그 세기적 드라마 속에 이미 오늘의 국정혼란, 국론분열의 씨앗이 잉태되고 있었다. 남북 두 정상이 단숨에 만든 ‘6·15 공동선언’에 사려 깊게 채워넣었어야 할 빈자리가 그것이다. 대표적인 대목이 바로 북한측의 주장과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 ‘자주적 통일문제’나 ‘낮은 단계의 연방제’ 부분이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를 내부적으로 분열시킬 소지를 안고 있다는 점 때문에 최대한 철저히 거쳤어야 할 공론화 절차를 ‘화려한 성취감’에 도취된 탓인지 간과했다는 얘기다.

▼관련기사 ▼

- '한반도 평화정착'만 긍정평가
- [DJ집권 3년반 여론조사]"국정운영 불만" 64%

▼공론화 절차의 경시▼

이 대목과 관련, 김 대통령은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과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김 대통령은 이어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지난해 6월16일 국무회의에서 “내가 오랫동안 구상해온 3단계 통일방안에 대해 설명했다”며 “1단계 남북연합, 2단계 연방, 3단계가 통일인데 1단계는 현재대로 가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바로 이런 상황은 “김 대통령의 개인적인 노력의 결집체인 ‘3단계 통일론’의 구상이 우리 헌정체제의 절차에 비춰볼 때 국책으로 이어질 수 있느냐” “이는 통치권적 차원의 초법적 행위 아니냐”는 논란을 전문가들로부터 불러일으켰다.

남북정상회담 개최 이전에도 통일방안이나 주요사항에 대한 공론화 절차가 거의 없었다. 또 정상회담 이후에도 국회나 국민투표 등 헌법상 규정된 국론결집 노력은 보이질 않았다는 점에서 여전히 불씨를 안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남북 간 현실에서 정상회담 같은 역사적 성과물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비밀주의나 비공개접촉이 불가피하지만 그 이후에는 공론화 과정과 초당적인 합의를 거쳐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어제의 초심과 오늘의 질곡▼

김 대통령은 취임 이후 기회있을 때마다 “결코 남북문제를 서두르지 않겠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의 현실인식은 이러한 다짐과 거리가 멀다. 가장 상징적인 대목은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문제다.

통일부가 올해 주요업무 추진계획으로 발표한 대북정책의 첫번째 과제도 상반기를 목표로 한 제2차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일 정도로 모든 관심은 김 위원장의 답방에 모아져 있었다. 김 대통령도 5월1일 방송회견부터 6월1일 제주 평화포럼에 이르기까지 김 위원장의 ‘답방 촉구’를 여덟차례나 되풀이하는 등 집착을 감추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은 김 위원장의 답방이 가져올 긍정적 효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국론분열의 주요 원인이 됐다. 또 한편으로 북한으로 하여금 남측의 입장을 오해하게 만들 소지도 증폭시키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낳았다. 다시 말해 현재의 혼란은 김 대통령 취임 초기의 대북정책의 기조가 남북정상회담을 거치면서 갖게 된 ‘기대감’의 영향권 안에서 상당부분 흔들린 결과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이른바 상호주의, 퍼주기 논란도 따지고 보면 모두 이 같은 현실과 기대의 괴리에서 빚어진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고유환(高有煥) 동국대교수도 “대통령의 임기 내에 성취하겠다는 과욕이 있었기 때문에 중간 중간에 무리수가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한다.

물론 현재의 남북관계는 북측의 비협조적인 행태로 인해 정체된 측면이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혼란을 극복하고, 남북 간 평화정착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서는 김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에 가진 방북성과 대국민보고에서의 초심을 다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가능성을 보고 왔을 뿐이다.”

▼전문가 대북정책 제언 "국민합의 이끌 공론 필요"▼

정부의 대북정책으로 유발된 우리 사회 내부의 혼란에 대한 전문가들의 처방은 냉전체계 갈등구조의 해소와 대국민 통합을 위한 공론의 장(場)을 마련해야 한다는 줄거리로 모아진다.

동국대 고유환(高有煥·북한학과) 교수는 “기본적으로는 분단 반세기의 이념갈등과 정상회담을 통한 화해 협력의 약속이 1년밖에 지나지 않은 현실과의 괴리에서 빚어진 갈등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또 현 정권이 통일방안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는 현실이 공동여당의 입장차이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는 분석도 내놓는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각종 법체계의 손질과 논의가 필요했지만 공동정권이 이를 본격적으로 다루지 못했고 이 와중에 남북교류가 진행되면서 파행을 빚었다는 것이다.

통일연구원 허문녕(許文寧) 연구위원은 “국론통일을 위한 공론의 장을 열어 북한과의 통일과정에서 양보할 수 없는 최저선이 무엇인지 합의를 도출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취임 초기에 통일을 하려는 게 아니라 여건을 조성한다고 강조한 점을 되새겨야 한다”며 “지나친 성과보다는 냉전구조 해체와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기반 조성에 주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삼성경제연구소 김연철(金鍊鐵) 책임연구위원은 현재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의 마련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정한 사람이든 집단이든 지금은 남북정상회담 이후의 사태를 종합정리한 뒤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에 따른 조정그룹이 만들어지면 대북정책이나 남북관계를 정쟁의 대상에서 제외시킬 수 있도록 여야의 합의를 이뤄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김영식기자>spear@donga.com

▼평화협정 조바심 美오해-마찰 초래▼

김대중대통령의 평화 관련 발언 변화
시기김대통령의 발언 내용비고
1998.2.25남북간의 화해와 교류협력과 불가침, 이것을 그대로 실천만 하면 남북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고 통일에의 대로를 열어나갈 수 있다대통령취임사
2000.3.9북한의 완고한 폐쇄정책에도 불구하고 대립과 갈등의 냉전구조를 해체하고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한국은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베를린 선언
2000.9.112003년 퇴임하기 전에 북한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기를 희망한다뉴욕타임스 인터뷰
2000.11.1남북한이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한 후 군비통제 또는 감축문제 해결에 나서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코리아타임스 회견
2001.2.16냉전이 끝을 맺는 외교성과가 금년에 이뤄져야 한다.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계기로 한반도에서 냉전이 종식될 수 있도록 사전준비가 있어야 한다외교통상부 업무보고 때
2001.3.8김정일 위원장이 서울에 오면 긴장완화와 교류협력을 병행해서 논의하겠다. 긴장완화 문제는 평화선언식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지만 92년의 남북기본합의서를 활용하는 방안을 생각해 보고 있다미국 기업연구소·외교협회 공동주최 오찬 연설회
2001.3.20앞으로는 지금까지 이룩해온 남북간의 화해협력을 확실하게 뿌리내리면서 한반도의 냉전구조를 해체시키는 ‘평화 프로세스’의 진행에 더한층 주력해 나갈 것이다공군사관학교 졸업 및 임관식

“서독은 진지하고 성의 있는 노력으로 통일 독일에 대한 주변국들의 우려를 사전에 불식시켰으며 놀랍게도 소련과 동유럽 공산권의 이해와 협력까지 얻어냈다.”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해 3월9일 발표한 ‘베를린 선언’에서 햇볕정책을 추진하는 한국 정부가 독일로부터 얻은 교훈 중 하나라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된 이후 남북평화협정 체결에 대한 김 대통령의 집착은 동맹국인 미국의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평화협정’이라는 용어사용 변화를 둘러싼 일련의 과정은 이 같은 흐름을 잘 보여준다.

김 대통령은 지난해 9월11일자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남북간 평화협정 체결이 임기가 끝나는 2003년 전에 가능하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 조기성사를 위한 정부의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이어 김 대통령은 올 2월16일 외교통상부의 업무보고 때 “김 위원장의 답방을 계기로 한반도에서 냉전이 종식될 수 있도록 사전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해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 때 평화협정 또는 평화선언 채택’이라는 관측에 더욱 힘이 실렸다.

그러나 올 3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첫 한미정상회담 등을 통해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한 미국의 심각한 의구심을 확인하고 크게 당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측의 불만은 “‘평화선언’이나 ‘평화협정’은 ‘한반도 정전(停戰)상태의 종료’를 의미하고 그것은 주한미군 3만7000명의 지위와 직결되는데 한국 정부가 혼자 무슨 일을 꾸미는 것이냐”는 것.

임동원 통일부장관은 3월27일 기자간담회에서 “평화선언은 군사신뢰구축 등의 ‘프로세스’가 시작된다는 가벼운 뜻인데 비약해서 ‘평화조약’이란 종점단계로 (미측이) 오해했던 것 같다”고 해명했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평화협정’과 관련한 한미간 갈등은 진작 예견됐지만 상당 기간 방치돼 왔다”며 “햇볕정책 추진에 있어서는 ‘쇠가 뜨거워졌을 때 두들겨야 한다’는 논리가 지배적이어서 속도조절론조차 냉전 논리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부형권기자>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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