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총재는 권철현(權哲賢) 대변인에게서 국내 언론 보도 내용을 보고받고 “대통령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은 ‘사람이 사람을 못 만날 것 없다’는 (원론적인) 뜻”이라며 “지금은 영수회담보다 대통령이 국정쇄신에 주력해야 할 시기”라고 잘라 말했다고 권 대변인이 전했다.
권 대변인은 “한나라당은 그동안 일관되게 선(先) 국정쇄신을 요구해온 만큼 대통령의 가시적 조치가 없는 상황에서 두 분이 만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부연 설명했다.
그는 이어 “국정쇄신의 예를 들어 달라”는 기자들의 요구에 “신건(辛建) 국가정보원장과 신승남(愼承男) 검찰총장의 자진 사퇴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중립내각 구성 등 인적쇄신 및 국정 운영 시스템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고 답했다.
한나라당이 이처럼 영수회담의 ‘선결조건’으로 국정쇄신을 촉구하는 이면에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민주당 총재직 사퇴 진의를 믿을 수 없다는 불신감이 작용하고 있다. 김 대통령이 진짜 마음을 비웠는지 불분명한 상황에서 이 총재가 덜컥 김 대통령을 만났다가 발목이 잡힐 경우 이 총재만 입장이 난처해질 수 있다는 계산이다.
실제로 이 총재의 한 핵심 측근은 “이 총재가 얼마 전 정국 대처방안을 묻기에 ‘서둘지 말고 연말 개각까지 지켜보고 회담을 갖든 말든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더니 총재도 공감하더라”고 전했다.
뿐만 아니라 이 총재로선 “영수회담은 김 대통령만 좋은 일”이라는 영남권 의원들을 중심으로 한 대여(對與) 강경 여론도 무시할 수 없는 형편이다. 이들은 특히 “김 대통령의 총재직 사퇴 후 일각에서 김 대통령에 대한 온정적 정서가 조성돼 과거 실정(失政)까지 묻혀 버리는 느낌”이라며 당 지도부에 오히려 김 대통령을 강공으로 압박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래저래 영수회담의 성사까지는 우여곡절이 예상된다.
<모스크바〓송인수기자>i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