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민주당에서 급부상한 정계개편 논의에 대해서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측근들 간에도 찬반 양론이 분분하고, 당내 대선예비주자들의 생각도 저마다 다르다. 이에 따라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반대편에서 상대방의 논지를 비판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정계개편론을 중심으로 한 민주당의 세력재편 움직임마저 감지되고 있다.
▽이인제(李仁濟)와 당 지도부의 제동〓이인제 상임고문 측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정계개편논의의 바탕에 뭔가 이상한 구석이 있다고 보고 있는 듯하다. 정계개편론의 시발인 민국당 김윤환(金潤煥) 대표의 구상이 ‘이인제 필패론’과 ‘영남후보론’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분석 때문이다.
김 대표는 실제로 지난해 이 고문을 만나 “총리를 하는 것이 어떠냐”며 “킹메이커가 돼달라”고 제의한 바 있다. 이 고문이 출마 대신 한나라당 박근혜(朴槿惠) 부총재나 정몽준(鄭夢準) 의원, 이수성(李壽成) 전 국무총리 등 영남후보를 밀어주면 필승이라는 것이 김 대표의 논리였다.
그런 김 대표가 정계개편론을 들고 나오자 이 고문 측은 ‘3김(金)’이 배후에 있는 것 아니냐고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권노갑(權魯甲) 전 최고위원 등이 정계개편 반대론에 서자 자신감을 가지고 ‘경선 전 정계개편 논의 중단’을 공개선언하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 지도부도 31일 주요당직자회의에서 당론을 ‘선(先) 국민참여경선제 홍보’에 모음으로써 최근의 정계개편론에 제동을 걸었다. 정계개편론이 대세를 장악했다면 모를까 당내 찬반이 분분한 상황에서 이를 공론화 단계까지 끌고 가긴 어렵다는 판단이 작용한 듯하다.
▽DJ 측근들의 이몽(異夢)〓정계개편 추진세력의 핵심인 정균환(鄭均桓) 의원은 당 사무총장 원내총무 총재특보단장을 역임한 김 대통령의 측근이다.
특히 98년 국민신당과의 통합, 지난해의 민주-자민련-민국당간의 ‘3당 정책연합’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당내 최대 규모의 의원모임인 중도개혁포럼의 실질적 리더인 정 의원이 개편론의 전면에 나서자 여권 전체가 “뭔가 있다”며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추동력이 뒷받침되지 않아 주춤거리고 있다. 정 의원은 그동안 민주당 내 대선주자 7명은 물론 많은 의원과 접촉했다. 그 결과 의원 저변과 대선예비주자들의 생각이 다르다는 확신을 갖게 된 듯하다.
그래서 정 의원은 이인제 고문이 ‘논의 중단’을 요구하고 나서는 등 강한 역풍(逆風)이 닥쳤음에도 불구하고 31일 “정치변혁기인 지금 외에는 정치지형을 바꿀 시간이 없다”며 거세게 밀어붙일 태세다. 그는 “한나라당 집권 저지가 이 시대의 최대 개혁”이라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한화갑(韓和甲) 고문도 비슷한 생각이다.
그러나 정작 대통령의 또 다른 측근인 권노갑 전 최고위원은 정계개편론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는 “분명코 말하지만 합당은 없다. 내 말을 믿으라”고까지 단언하고 있다. 그는 지난해 말까지도 김윤환 대표 등과 정치지형의 변화를 모색해왔지만 지금은 “민주당의 정치일정이 확정돼 시간이 늦었다”고 보고 있다. 이인제 고문과 입장이 같다.
▽다른 주자들의 속내〓노무현(盧武鉉), 김근태(金槿泰), 정동영(鄭東泳) 상임고문은 주로 색깔과 이념적 측면에서 정계개편을 반대하고 있다. 이념이 다른 사람들이 대선승리를 위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명분에 어긋난다는 것. JP나 민국당 김 대표에 대한 거부감도 상당부분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보수적 이미지의 김중권(金重權) 상임고문은 좀 다르다. 표면적으로는 노, 김 고문과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김윤환 대표가 말하는 ‘영남후보론’이 자신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
▽자민련과 민국당〓민주당의 백가쟁명(百家爭鳴)식 의견표명에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자민련 정진석(鄭鎭碩) 대변인은 “솔직히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내젓고 있다. 처음에는 “뭔가 조직적인 흐름이 있다”고 판단했으나 지금은 “정교한 논의나 프로그램 없이 엉성하게 터져 나온 것 같다”는 쪽으로 생각하는 모습이다.
그동안 민주당 김원기(金元基) 상임고문과 민국당 김 대표 등을 은밀히 접촉하며 ‘큰 그림’을 모색해온 조부영(趙富英) 부총재도 “지켜보자”며 일단 관망자제로 물러섰다.
민주당쪽 인사들을 부지런히 접촉해온 민국당 김 대표는 민주당 대선후보가 결정된 다음 합당이 이뤄지면 자민련이나 민국당은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강하다.
하지만 민주당 내 사정이 마음먹은 대로 돌아가지 않자 답답해하고 있다. 2000년 총선 때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총재로부터 ‘팽(烹)’당했다고 생각하는 김 대표로서는 ‘3김 연합’을 통한 ‘반(反) 이회창 연대구축’에 정치생명을 걸고 있다.
윤영찬기자 yyc1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