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엔 타협없다”…李총재 黨 분란때마다 강경대응

  • 입력 2002년 3월 13일 18시 18분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총재는 13일 서울로 떠나기 전 일본 도쿄에서 주일 한국 특파원들과 간담회를 갖고 “돌아가서 직접 눈으로 보고 결론을 내리겠다”고 말했다. 당 내분사태에 관한 말이었다.

98년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 체제
출범 이후 당 내분
구분내분 상황 및 수습 결과
98년 ‘8·31’ 전당대회 후 당직갈등이 총재, 김윤환 전 의원의 수석부총재직 요구 정면 거부 후 실무형 부총재단 구성.
99년9월 민주산악회 재건 갈등이 총재, 민산 재건 3인방의 당무위원직 박탈 후 사태 수습
2000년 2월 총선공천 파문이 총재, 김윤환 이기택 신상우 전 의원 등 비주류 중진의 공천 물갈이 단행

더 이상 언급은 없었지만, 수행한 당직자들은 이 말속에서 이 총재가 위기 때마다 구사해온 ‘정면 돌파’ 전략을 떠올리는 듯했다. 이 총재는 97년 대선 패배 후 여러 형태의 당내 분란을 겪었다. 갈등 정도에 따라 일부 양보도 있었지만, 근본적인 궤도수정은 허용치 않았다.

이 총재의 첫 고비는 친정체제 구축에 나섰던 98년 ‘8·31’ 전당대회 직후 김윤환(金潤煥) 전 의원과의 힘겨루기였다. ‘이회창 만들기’의 일등공신이었던 김 전 의원은 당시 명실상부한 당내 2인자 위상을 확보하기 위해 수석부총재나 당무회의 의장직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총재는 “다른 계파들이 반대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그 요구를 물리쳤다.

99년 김명윤(金命潤) 전 의원과 강삼재(姜三載) 박종웅(朴鍾雄) 의원이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의 사조직인 민주산악회 재건을 시도하면서 당은 다시 내분에 휩싸였다. 이 총재는 이들이 재건식을 강행한 지 사흘만에 세 사람의 당무위원직을 박탈하는 초강수로 사태를 진화했다.

최대 위기는 2000년 2월의 16대 총선 공천 파문. 김윤환 이기택(李基澤) 신상우(辛相佑) 전 의원 등 비주류 중진들을 공천에서 대거 탈락시키자 당내 동요가 극심해졌다. 이 총재는 일부 조직책을 재조정하고 공천설계자인 윤여준(尹汝雋) 당시 여의도연구소장을 2선으로 후퇴시키면서 수습에 나섰지만 ‘중진 물갈이’는 그대로 관철했다.

정연욱 기자 jyw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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