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남찬순]´탈북자 외교´ 적극 나서라

  • 입력 2002년 3월 18일 18시 18분


어제 서울에 온 탈북자 25명은 꿈에나 그리던 제2의 삶을 시작하게 됐다. 중국대륙을 헤매고 있는 수많은 탈북자들에게는 더 없는 동경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탈북자들에게 또 다른 혹독한 시련의 계절을 예고하고 있다. 벌써부터 중국공안당국의 감시가 강화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다. 그들과 탈북자들 사이에는 쫓고 쫓기는 추적전이 벌어질 것 같다. 중국의 탈북자들에게 온 봄은 봄이 아니다.

한국정부는 이번 일을 두고 ‘조용한 물밑 접촉’의 성과라며 스스로 평가하는 분위기다. 중국정부가 당초 예상보다 빨리 추방이라는 단안을 내려 모든 일들이 순탄하게 진행됐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또 탈북자문제에 관한 한 지금까지는 ‘조용한 물밑 접촉’이 효과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탈북자들을 위한 송환 교섭을 하면서 이래저래 곤란한 처지인 중국과 북한의 심기를 자극할 필요가 없었다. 서로가 눈치껏 행동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조용한 외교´의 한계▼

하지만 탈북자문제는 이제 그런 조용한 물밑 접촉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과 범위를 넘어서고 있다. 쉬쉬하며 눈치껏 해결할 수 있는 때가 지났다. 우선 서울로 오겠다는 탈북자 수가 급증하고 있고 그 방법도 다양해 졌다. 중국에 잘 봐달라는 식의 ‘부탁’이나 하는 외교 방식으로는 계속 심각해지는 탈북자문제의 본질에 접근할 수 없다. ‘부탁’도 한두 번이지 나라의 자존심도 생각해야 한다.

이번 경우도 엄밀히 따지고 보면 ‘조용한 물밑접촉’의 성과라고 자랑할 게 없다. 외교부가 한 일이 무언가. 외교부는 중국과 스페인 유엔 등과 폭넓은 접촉을 했다고 하나 그 접촉이 문제해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 의문이다. 한국은 교섭과 협상의 주역이 아니라 제3자적 위치에 설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한계를 안고 있는 데다 외교력이 상황을 주도할 만큼 강력한 추진력을 가진 것도 아니다.

급증하고 있는 ‘서울행’ 탈북자들 그리고 그에 따른 이해 당사국들 간의 외교적 마찰과 갈등을 고려하면 지금과 같은 중국의 ‘처분’만 기다리는 외교로는 곤란하다. 탈북자문제는 제3자적 위치가 아닌, 중국과 대등한 관계에서 양국 간 외교현안으로 정식 제기되어야 한다. 이 문제는 북한과 중국간의 관계에 못지 않게 한국과 중국간의 문제로 비중이 커졌기 때문이다.

우선 양국 사이에 탈북자문제 해결을 위한 전담 협의기구가 설치되어야 한다. 문제의 특수성이나 전문성 그리고 업무의 양으로 볼 때 기존 외교채널로는 한계가 있다. 한국과 중국은 이 기구를 통해 탈북자의 법적 지위나 보호문제 등에 대해 전반적인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탈북자에 대해서는 중국과 북한이 이미 ‘불법월경자’라는 법적 성격을 규정해 놓았기 때문에 한국과 중국이 그들의 지위를 다시 규정하는 것은 논리상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탈북자문제가 한국과 중국간의 외교현안으로 본격 논의된다면 협상의 여지는 충분히 있을 것이다.

중국은 탈북자문제를 국제기구나 제3국이 개입할 사안이 아니라고 강조하지만 그 같은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지고 있다. 수많은 민간 단체들이 탈북자를 돕고 있다. 국제사회가 실상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중국도 내부적으로는 그 같은 국제사회의 시선을 의식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보더라도 중국은 언제까지 북한의 입장만 등에 업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중국에 공식 협상 제기해야▼

중국이 짊어지고 있는 탈북자문제의 짐은 앞으로 더욱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한국과 중국간의 협상기회는 넓어진다. 상황이 이런데도 한국 정부는 여전히 탈북자문제 해결에 소극적이다. 중국에 공개적으로 ‘말걸기’조차 꺼리는 분위기다. 각종 국제단체들은 탈북자 수가 10만 또는 30만명이나 된다며 그 심각성을 지적하고 있는데 한국 정부는 오히려 그 수가 1만∼2만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난민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는 탈북자는 겨우 몇 백명에 불과하다는 등 자꾸 문제를 축소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탈북자보다는 북한의 입장을 더 챙기려는 것은 아닌가. 그러면서도 ‘조용한 외교’의 성과니 ‘물밑 접촉’의 결실이니 하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다.

한국이 앞장서 중국에 탈북자문제를 외교현안으로 제시하고 적극적인 논의를 요구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탈북자문제는 부끄러운 일도 숨길 일도 아니다. 한국이 떳떳하게 나서서 해결해야 할 일이다. 햇볕정책에 흠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탈북자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더욱 우둔한 짓이다.

남찬순 논설위원 chans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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