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철칼럼]´정치신념´ 변했다면…

  • 입력 2002년 4월 10일 18시 10분


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인천경선 승리 후 ‘엄청난 모략과 색깔공세를 이겨낸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일갈했다. 과연 그럴까. 선거전략상 한 말이겠지만 성급하다는 생각이다. 아니 그보다 한시라도 빨리 궁지에서 벗어나고 싶은 노 후보의 심정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노 후보가 ‘모략과 색깔’로 지칭한 내용들은 그렇게 쉽게 사라질 사안들이 아니다. 대선후보의 정치이념, 정책노선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대선 본선은 물론 설령 대권을 잡는다 하더라도 그 이념과 노선은 끝까지 따라다닌다. 모략이나 색깔이란 말로 그렇게 간단히 씻어지는 것이 아니다. 당시 상황을 고려한 발언이란 ‘장(場)의 논리’로 설명하고 반박했지만 ‘주한미군 철수’ ‘재벌 해체’ 발언은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말로 간단히 지워질 수 없다. 그리고 아직도 ‘보안법 폐지’는 그의 소신이다.

▼´체제 위협감´에 긴장▼

정치인의 이념과 정치적 신념은 그동안의 경험과 사고를 통해 오랜 기간 축적돼 온 것이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서 순간순간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 또 자신의 정치적 신조를 그렇게 바꾸는 것도 아니다. 더욱이 그리 쉽게 바꾸는 말을 믿을 사람도 없다. 새롭게 불거진 언론의 ‘국유화’ ‘폐간’ 발언도 사고의 근저에서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문득문득 ‘노 후보는 과연 대통령선거에 나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불안감과 겁을 주면서 어떻게 선거를 치러 나가겠는가 하는 말이다. 노 후보 말대로 대통령이 돼 국민을 통합시켜 나가겠다면 주한미군, 재벌, 보안법 문제에 대해 소신을 달리하는 많은 사람들이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근본적으로 이는 체제와 관련된 문제란 점에서 심각성이 크다. 노 후보는 정책의 변화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노 후보와 다른 신념 속의 사람들에겐 지금까지 살아온 체제를 뒤엎어 버리는 개벽(開闢)이다. 이런 판국인데 이들이 가만있겠는가. 이들에게 ‘장의 논리’란 설명은 군색한 변명이고, 의구심만 더 키운 결과가 됐다. 더욱이 그런 충격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노 후보는 이 대목을 심사숙고해야 한다.

노 후보의 설명은 또 다른 문제를 표출시켰다. ‘악법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외칠 때 환호했던 현장의 근로자들, 그리고 ‘주한미군 철수’와 ‘재벌해체’에 공감하면서 성원을 보냈던 지지자들에게는 과연 입장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막말로 그들은 뭐란 말인가. 당장 눈앞에 닥친 당내 경선 승리를 위해서라면 별의별 응급처치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자세로는 더 큰 승리에 다가서기 어렵다. 지금 노 후보가 겪고 있는 상황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큰일을 도모하고자 하는 정치인일수록 한마디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를 새삼 깨우치는 대목 아닌가.

지금 ‘노풍(盧風)’이 분다고들 한다. 노 후보는 이 바람에 휩쓸리지 않고 바람의 내용을 대단히 보수적으로, 셈을 깎듯이 판단하고 소화해야 한다. 이념이나 색깔 논쟁을 일순간 날려버렸다고 치부하다간 스스로 더 큰 함정에 빠질 수 있다. 단발성 문답으로 끝난 이념검증과정이 신선한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이지 문제의 소지(素地)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다. 더욱이 지금까지는 김대중 대통령 지지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민주당 내 행사다. 본선은 전혀 상황이 달라진다. 반DJ 분위기가 강한 곳이 더 많다. 그런 관점에서 정치이념, 정책노선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힐 필요성이 큰 쪽은 오히려 노 후보 자신이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노 후보는 자신의 바람에 떠 버린 것 같다. 언론관에 대한 입장 표명에서 드러난 일련의 말바꾸기와 과격 발언이 실례다. 추종자들에게 투사적 이미지를 남기려 했는지 모르지만 오히려 인물검증면에선 도덕성의 문제점과 함께 ‘어딘가 불안한 사람 아닌가’ 하는 점을 부각시키지는 않았는가. 냉정하게 보라. 당원보다는 국민이 더 엄정하고, 더 많다. 투쟁력보다는 절제력이 포스트모더니즘시대 정치지도자의 더 큰 덕목이다.

▼절제력 더 큰 덕목이다▼

당내 경선과 ‘노풍’은 권력형 비리에 대한 국민적 관심에 차단막을 침으로써 집권세력에겐 지금 효자노릇을 하고 있다. 여기서 우려되는 것은 만의 하나라도 집권세력 일각에서 ‘이런 상황이라면 이번 기회에 보다 큰 판을 확 바꿔볼 수도 있지 않느냐’고 생각할 가능성이다. 지난달 25일 자신의 본바닥 대구경선을 앞둔 김중권 후보의 돌연한 사퇴와 최근 거론되고 있는 문희갑 대구시장 비리혐의 수사를 연결하는 의혹의 시선이 있는가 하면 민주당 연청(聯靑)조직의 경선 개입 의혹도 제기된 상황이다. 큰 틀에서 정계개편과 음모론의 불씨는 아직 살아있다.

최규철 논설실장 ki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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