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까지만 해도 김 대통령이 하야하는 것에 대해서만은 소극적이었던 한나라당이 마침내 하야 문제까지 들고나온 것은 영남권의 ‘반(反) DJ 정서’를 다시 결집하고 김 대통령의 손발을 완전히 묶어 놓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때문이라는 게 당 관계자들의 얘기이다.
이강두(李康斗) 정책위의장은 주요당직자회의에서 최씨의 녹음 테이프에 있는 “최규선의 말 한마디에 대통령이 하야해야 하는데 걱정이다”는 대통령 비서관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무슨 비리가 있기에 대통령이 하야해야 하는지 청와대는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이재오(李在五) 원내총무는 “본래 죄 진 사람이 자기 죄를 더 잘 아는 법이다”며 “사태가 이 정도 됐으면 대통령이란 사람이 온 국민에게 마이크를 잡고 용서해달라고 고개를 팍 숙이든가, 외교 국방만 하고 내정은 비상중립내각에 맡기든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2단계 투쟁인 지방 규탄대회를 마치는 다음 주 초까지 대통령이 다른 자세를 보이지 않으면 3단계 투쟁인 대통령 탄핵 퇴진 운동 돌입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홍걸씨와 유상부(劉常夫) 포스코 회장의 면담 주선 의혹이 제기된 이희호(李姬鎬) 여사의 조사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이상득(李相得) 사무총장은 “청와대 안방 주인까지 아들 비리에 연루되는 일이 발생했다”며 “이 여사는 실상을 정확히 밝히고 대국민 사과를 한 뒤 검찰 수사를 받으라”고 촉구했다.
한나라당은 권력비리가 잇따라 터지면서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후보의 지지도가 주춤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당분간 비리 공세를 계속할 방침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대통령 하야 투쟁을 실제로 벌일지는 불투명하다. 대통령 하야 이후 정국에 대한 면밀한 득실 계산 또한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송인수기자 issong@donga.com
▼“또 뭐가 터질지…” 민주당 망연자실▼
미래도시환경 대표 최규선(崔圭善)씨가 구속 직전 녹음했다는 ‘육성 테이프’가 폭로되자 민주당은 망연자실한 표정이다.
당 관계자들은 “당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일이다. 최씨의 일방적 주장인 만큼 논평할 가치가 없다”며 일축했지만 최씨가 권력핵심부에 근접해 있었다는 점 때문에 어떤 형태로 ‘2탄’ ‘3탄’이 터져 나올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특히 최씨가 폭로한 ‘밀항 대책회의’나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3남 홍걸(弘傑)씨에게 ‘100만원짜리 수표 300장을 건넸다’는 주장이 사실로 입증될 경우 정권 전체의 도덕성에 치명상을 안겨줄 수도 있다며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당 일각에서는 비선(秘線) 중심의 권력 운용이 이런 결과를 불러왔다며 “이래 가지고야 어떻게 전 정권과의 차별성을 주장할 수 있겠느냐”는 자탄의 소리도 나오고 있다.
다만 당 관계자들은 최씨가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전 총재측과 깊숙이 연계돼 있다는 흔적이 나오고 있는 데 대해 한 가닥 기대를 거는 모습이었다.
한 관계자는 “구속된 최씨가 구명을 위해 한나라당과 줄타기를 하며 청와대와 민주당에 불리한 진술을 하거나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정용관기자 yonga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