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고유환/北의 ´명분집착증´

  • 입력 2002년 5월 9일 18시 24분


지난달 초 남측의 임동원 대북 특사가 평양을 방문해 ‘4·5 공동보도문’을 만들어 냄으로써 남북관계 진전의 불씨를 간신히 되살렸다. 그러나 북측이 5월 7일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던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경추위)’ 제2차 회의를 무산시키는 바람에 또다시 남북관계를 정체상태에 빠뜨렸다. 남북관계의 ‘원상회복’을 합의한 지 한달 만에 북측이 약속을 깨고 남북대화에 응하지 않음으로써 남측 당국을 궁지에 몰아넣고 우리 모두를 다시 한번 실망시키고 있다. 북한이 경추위 회담에 응하지 않은 이유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표면적으로는 경추위 북측대표단 성명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남측의 최성홍 외교통상부 장관의 발언을 문제삼아 회담에 응하지 않았다. 북측은 남측 외교부 장관의 워싱턴포스트와의 회견 내용을 ‘미국의 대북 강경 정책이 북한으로 하여금 남북대화로 나오게 했다’는 발언으로 이해하고 이를 문제삼은 것이다.

▼經推委 등 실리보다 명분 택해▼

북측은 남한 당국이 한 쪽에서는 ‘민족공조’를 강조하면서 다른 쪽에서는 ‘외세공조’를 강조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한다고 보고 이러한 행위를 북측에 대한 ‘배신행위’로 규정하고 최 장관의 경질을 요구해 왔다. 이러한 북측의 요구를 남측이 들어주지 않자 북한은 경추위 회담에 나오지 않은 것이다. 북한은 장충식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와 홍순영 전 통일부 장관의 경질에 고무돼 이번에도 문제가 된 장관의 경질이 이뤄지지 않으면 대화에 나오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대선 정국으로 들어간 국내 정세를 고려한다면 북측의 이러한 요구는 ‘내정간섭’에 가까운 무리한 요구다.

둘째, 남측이 북한의 금강산댐(안변청년발전소)의 안전성 문제를 제기하면서 경추위가 열리면 이 문제를 거론한다고 하자 북한 군부의 반발을 의식해 회담에 응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안변청년발전소를 ‘인민군들이 이룩한 고귀한 위훈의 창조물’이라고 하면서 안전성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은 남한에서 금강산댐 붕괴론이 나오게 된 것은 남북관계의 개선을 바라지 않는 외부세력(미국)의 개입과 극우 보수세력(남한의 외세공조 세력)의 ‘불손한 기도’가 깔려있기 때문으로 인식하고 이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남북대화에 응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북한 당국이 금강산댐 문제에 과민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은 군인들이 건설한 댐의 안전성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군부의 권위에 대한 훼손으로 인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은 김정일시대 기본통치방식으로 ‘선군정치’를 표방하면서 안변청년발전소 건설을 ‘혁명적 군인정신’의 ‘표상’으로 내세워 왔다. 따라서 경제관료들인 경추위 대표단이 군부가 작업한 금강산댐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판단하고 회담에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남쪽 수자원학회 조사단의 현지조사 결과에 의하면 금강산댐이 붕괴될 경우 북한도 위험하다고 한다. 북한은 국토환경보호성 대변인 담화에서 금강산댐을 ‘민족의 이익과 번영을 첫 자리에 놓고’ 만들었으며 ‘안전성은 과학기술적으로 확고히 담보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남북한 주민들의 불안감을 덜어주기 위해서라도 댐의 안전성에 관한 공동조사를 하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셋째, 특사 방북에서도 확인했듯이 정책전환을 위한 사상 이론적 조정 없이 지도자의 결단에 의존하는 북한 의사결정 구조의 경직성 때문에 내부 의견조율이 잘 이뤄지지 않아 회담에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북한 당국은 남북경협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제도 개혁을 시도하지 않고 지도자의 결단에 의존해 남북경협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비무장지대(DMZ)를 관통하는 철도 및 도로연결과 개성공단 설치 등에 따른 체제개방 문제와 관련해 온건 개방파와 강경 군부 사이에 의견조율이 이뤄지지 않아 회담에 나오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경제재건 기회 잃을 수도▼

어쨌든 북한은 이번에도 식량 30만t 등의 지원을 협의할 경추위에 응하지 않음으로써 ‘실리’보다는 ‘명분’을 택했다. 북한이 남북경협 및 대외개방과 관련한 체제개혁을 통해 일관되게 개방정책을 추진하지 않고 사소한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명분에 집착할 경우, 경제재건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체제붕괴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북한 당국은 미국 빌 클린턴 정부 말기 대미협상의 시간을 놓쳐 조지 W부시 행정부와 원점에서부터 다시 협상을 해야 했듯이, 현재의 남북대화에서도 시기를 놓칠 경우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다시 한번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고유환 동국대 교수·북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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