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철칼럼]정치는 ´감동´이다

  • 입력 2002년 6월 19일 18시 25분


그제 밤 월드컵 8강 진출의 극적 승리는 온 국민을 격한 감동의 심연으로 몰아넣으면서 그 감동의 분출 에너지가 얼마나 폭발적인 것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정치의 요체도 따지고 보면 국민을 감동시키는 것 아닌가. 그런데 막상 6·13 지방선거 후 정치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면들은 낡은 필름을 되돌리는, ‘아니올시다’다. 한나라당은 자만에 빠지면 언제 민심이 돌아설지 모르니 조심하자며 온통 언동에만 신경쓰는 눈치고, 민주당은 참패 책임론을 놓고 내홍 양상이다. ‘민심 감동’ 과제는 저만치 밀어두고 자기 체면부터 세우고 현상유지나 보전에만 급급한 모습이니 대통령선거에서 어떻게 민심을 사로잡겠다는 것인가. 특히 민주당은 대선후보 재신임론과 후보 재경선론을 묘하게 버무려 놓으니 일반 국민이 왜 지금 그 어려운 정치 인수분해 문제를 대해야 하는지 모를 일이다.

▼달라진 ´정치 소비자´▼

지방선거가 던진 통렬한 메시지는 선거는 후보간 다툼이 아니라 누가 더 성실하게 민심을 찾고 감동시킬 수 있느냐로 결판난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모든 정당은 사실상 패자다. 그것은 남을 헐뜯는 비방전이 결국 맥을 못 추었다는 점과 낮은 투표율, 한심한 정당지지율에서 분명히 나타났다. 그런데도 과연 누가 이겼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실례로 광역의원 비례대표 정당별 전국 득표결과를 보자. 한나라 52%, 민주 29%, 민노 8%, 자민련 6%다. 언뜻 보면 그럴듯하지만 내용에선 참담한 수준이다. 3400여만명 유권자 중 투표율은 반에도 못 미치는 48%였다. 따라서 언제고 한 표를 던질 전체 유권자들로부터 얻은 지지율은 어느 정당을 막론하고 빈약하기 짝이 없다. 한나라당은 유권자 10명 중 3명의 지지도 못 얻었고 민주당은 그나마 2명에도 못 미친 셈이다.

민심이 그토록 냉엄한데도 지방선거가 끝난 후 정당에선 당선자들에게 꽃다발이나 주는 장면만 보여주었으니 실망스럽다. 지방선거를 대통령선거 도중 여론조사 정도로 여기는 듯한 인상만 준다. 지방선거는 목민관의 공개채용 경쟁시험이었고, 합격한 자치단체장들은 한참 멀어진 민심을 붙들 수 있는 현장 책임자들이다. 그렇다면 대선후보나 정당대표가 먼저 해야 할 것은 당선자들과 함께 지역공약 실현을 위한 진지한 모임부터 서둘러 갖는 일이다. 대통령선거 전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지만 대통령선거에서 가장 두려운 상대는 경쟁 후보, 경쟁 정당이 아니라 유권자요 국민이다. 이 점을 정확히 간파하는 후보에게 승리의 기회는 크다. 상대방 비방에 맞서 이전투구(泥田鬪狗)식 싸움이나 할 것이 아니라 그 시간과 노력을 민심 감동에 돌려 보라. 확언하지만 승리의 기회는 그곳에 더 있다. 지방선거에서 사회적 공분을 일으키지 못한 상대방 공격에 유권자는 냉담했다. 대통령 아들 비리 등 권력부패에 대해서는 어느 후보가 외쳐서가 아니라 국민적 분노가 용서치 않았던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집권세력에 치명상을 준 것은 바로 국민이고 그 심판이야말로 국민의 몫이다. 첨언할 것은 민심을 적당히 쉽게 구슬리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이제 유권자들은 크게 달라졌다. 복잡한 심리구조에 이해관계에도 철저한, ‘정치상품’의 소비자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대권을 꼭 쥐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기 앞서 대권 수용 준비는 돼 있는지를 스스로 점검하는 일이 시급하지 않은가. 이 판국에 와서 무슨 공자 말씀이냐고 웃을 일이 아니다. 다시 확언하지만 그 과정을 거칠수록 승리의 기회는 더 커진다.

▼대선은 ´큰 그릇´경쟁▼

우선 다양한 사회 구성요소를 수용할 용의가 있는지, 즉 다의성(多義性)의 여유가 있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일견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식이라면 애매모호한 것 아니냐 하겠지만 대선에서 절실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큰 집 지으려면 집터 역시 크게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개혁이니 반개혁이니, 진보니 보수니 하면서 좌우상하로 선을 긋고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된다고 내쳐버리는 것은 대통령후보의 지도력이 아니다. 사회적 분화현상이 전례 없이 심각한 분위기 속에 치러지는 이번 대선은 그래서 ‘큰 그릇’ 경쟁이다.

정치지도력의 또 다른 근간은 국민을 감동시킬 수 있는 힘이다. 월드컵이 보여줬듯이 사람은 자신감이 생기고 자존심이 살아날 때 감동한다. 지방선거에서 분명히 드러난 것도 바로 국민감동 결핍증이다. 민주당은 물론 특히 몸집이 더 불어난 한나라당은 적극적인 국민감동법을 갖추고 있는지 살필 일이다. 권력부패 응징만을 언제까지 기대할 것인가. 그 구체적 방안을 찾는 것이야말로 대선후보의 가장 큰 과제다. 선거 열풍은 바로 여기서 일어나야 한다. 민심을 감동시켜야 정치가 산다.

최규철 논설주간 ki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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