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사례로 본 北도발의도]지도자 지시? 군부 돌출행동?

  • 입력 2002년 7월 2일 19시 07분


1976년 8월18일 판문점에서 발생한 북한군의 도끼만행 사건.
1976년 8월18일 판문점에서 발생한 북한군의 도끼만행 사건.
6·29 서해교전은 북측의 의도된 도발임이 이미 분명히 드러났지만 이 사건이 북측 최고지도자의 직접 지시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군부의 독자적 도발인지는 아직 규명되지 않고 있다.

다만 북한의 고(故) 김일성(金日成) 주석이나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은 과거의 유사한 도발 사건에 대해 “일부 강경론자의 소행”이라고 여러 차례 언급한 적이 있다. 이는‘고도의 대남전술’로 보이지만, 북한 권력층 내부의 의사결정 과정을 엿보게 하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역대 주요 도발사건 이후 북한지도부의 행동을 관계자들의 증언과 기록을 통해 되짚어봤다.

▽‘1·21 사태’〓북한의 특전부대인 124 군부대 소속 무장간첩 32명이 침투해 경찰과 민간인을 살상한 68년 ‘1·21사태’에 대해 김일성 주석은 72년 5월 4일 평양에서 만난 이후락(李厚洛) 중앙정보부장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청와대 사건’이던가. 그것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게 대단히 미안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전적으로 우리 내부에서 생긴 좌경 맹동분자들이 한 짓이지, 결코 내 의사나 당의 의사가 아닙니다. 그 때 보위부 참모장, 정찰국장 다 철직(撤職·직위해제)하고 지금은 다른 일 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 부장을 수행했던 이동복(李東馥·당시 남북조절위원회 남측 대변인) 명지대 교수는 회고록 ‘통일의 숲길을 열어가며’에서 이같이 밝힌 뒤 김 주석의 동생인 김영주(金英柱)노동당 조직지도부장도 “좌경 맹동주의자들의 짓이다.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는 얘기를 했다고 전했다.

5월 평양을 방문한 박근혜(朴槿惠) 의원도 김정일 위원장으로부터 똑같은 유감의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항구(李恒九) 통일연구회 회장은 “‘1·21 사태’의 책임을 물어 군부 강경세력을 숙청했다고 했는 데, 죄명이 전혀 다른 것이었다고 알고 있다”고 반박했다.

▽푸에블로호 사건과 미 첩보기 격추 사건〓68년 1월23일 북한 해군이 공해상에서 미 해군첩보함 푸에블로호를 나포한 사건과 69년 4월 15일 미 공군 첩보기 EC121기를 격추시킨 사건에 대해서도 증언이 엇갈린다.

이 두 사건에 대해서는 당시 정황에 비추어 현지 사령관의 판단에 따른 작전 수행이었다는 분석이 우리 학계에서는 우세하다. 6·25 전쟁을 통해 미군의 가공할 위력을 직접 경험한 김일성 주석으로서는 미국을 고의적으로 자극하는 정치적 부담이 큰 행동을 직접 지시하지 않았을 것이란 분석이다.

그러나 이 같은 도발을 북한 지도부가 부추긴 측면이 많다는 증언도 있다.

유엔군사령부 정전위원회 수석대표의 특보로 68년부터 94년까지 판문점에서 근무한 제임스 리(72)는 “66년 10월5일 조선노동당 당대표자회의에서 김일성은 ‘미국의 베트남 침략에 반대한다는 사회주의 국가들은 그저 정치적 지지나 보낼 뿐 군대를 보내 미국과 맞서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연설문을 읽고 북한의 무력 도발이 빈번해질 것이라는 보고를 상부에 올렸다”고 밝혔다.

실제 66년 이전까지 1년간 많아야 수십차례에 불과하던 북측의 무력 도발은 이 연설 이후 67년 114건, 68년 181건으로 급증했다.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76년 8월 18일 발생한 이 사건으로 미군 장교 2명이 살해되자 미국은 북한과의 전쟁도 불사한다는 초강경 대응으로 맞섰다.

김일성 주석은 3일 뒤인 같은 달 21일 유엔사측에 북한 인민군 사령관 명의로 “앞으로는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 우리측은 절대로 먼저 도발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통지문을 보냈다.

유엔사측이 북측에 “사건 가담자 처벌도 하라”고 요구하자, 북측 인사들은 “통지문에 다 그 내용이 이미 들어 있지 않느냐”고 대답했다. 즉 김 주석은 내용을 몰랐던 만큼 김 주석으로 하여금 유감 표명을 하게 만든 책임을 당연히 물을 수밖에 없다는 암시였다.

▽남북기본합의서와 핵문제〓이동복 교수는 92년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당시의 일화를 소개했다.

“(기본합의서 채택 이후) 환담 도중 김일성이 느닷없이 ‘기본합의서는 7·4 공동선언의 재판이고, 기본합의서가 채택된 마당에 주한미군이 더 있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주한미군 주둔을 인정한) 기본합의서를 만든 북측 팀과 김일성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정황들 때문에 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를 탈퇴하며 한반도에 전쟁 위기를 몰고온 것도 김일성 주석과 실무자 간의 부정확한 의사소통 때문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외교통상부의 한 당국자는 “NPT 탈퇴는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차대한 것으로 김 주석의 승인 없이는 도저히 결정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97년 망명한 황장엽(黃長燁) 전 노동당 비서도 회고록에서 “북측이 저지르는 테러활동이나 38선에서의 도발행위 같은 것은 100% 예외없이 김정일의 허락 없이는 할 수 없다. 김정일이 ‘최근 정세가 조용하군. 조금 긴장시켜야겠어’라고 하면, 그건 그런 종류의 사건을 도발시키라는 의미이다”고 밝혔다.

부형권기자 bookum90@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