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시행 후 가장 먼저 청문회 자리에 선 사람은 2000년 6월 이한동(李漢東) 당시 총리서리였다. 의원 13명으로 구성된 인사청문특위는 14일 동안 활동했으나 정작 청문회를 개최한 것은 이틀뿐이었다.
당시 자민련 몫으로 총리직에 올랐던 이 총리서리에 대해 한나라당 의원들은 정치 공세 차원에서 시종 비난을 퍼부은 반면 민주당과 자민련 의원들은 이 총리를 보호하기에 급급했다.
민주당 정균환(鄭均桓) 원내총무는 16일 “그동안의 인사청문회에서는 여야의 첨예한 대립으로 한쪽은 청문회 대상자를 흠집만 내고 다른 한쪽은 보호만 하는 식이었다”고 평가했다.
대법관 6명이 한꺼번에 청문회 대상이 됐던 2000년 7월에는 하루에 3명씩을 대상으로 이틀간 청문회를 여는 바람에 수박 겉핥기식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의원들이 돌아가며 10여분씩 질의와 답변을 주고받는 것으로 청문회 절차가 모두 끝나 요식행위라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여야가 당내 대선후보 경선 문제에 온 신경을 집중했던 올해 2월에는 중앙선관위원 2명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열렸으나 의원들의 무관심 속에 불과 3시간여 만에 끝났다.2000년 7월 대법관 인사청문회에 참고인으로 출석했던 박원순(朴元淳) 참여연대 집행위원장은 “준비가 부족한 상당수 의원들이 구체적 근거를 가진 질문을 하지 못했고, 때론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도 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처럼 관련 시민단체와 전문가협회 등이 자료와 의견을 제출해 철저한 검증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제도가 개선돼야 한다. 내실 있는 청문회를 유도하기 위해 TV 생중계를 실시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윤종구기자 jkma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