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안안보포럼]北 "대화로" 美-日 연쇄접촉 '화해 손짓'

  • 입력 2002년 8월 1일 18시 40분


《지난달 30일부터 1일까지 브루나이에서 열린 ’동남아국가연합(ASEAN)+3’, 9차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외무장관회의 등 국제외교 행사는 6·29 서해교전 이후 고립됐던 북한이 ‘상황타개’를 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번 회의에서 북한은 남북대화뿐만 아니라 북-미, 북-일대화 재개에 합의하는 등 관계개선의 토대를 만들었다. 물론 북한의 적극적인 대화 재개 움직임이 어떻게 열매를 맺을지는 지켜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태도가 달라진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는 게 브루나이 현지에서 북한대표단을 접촉한 외교소식통들의 말이다. 회의 참가 직전 서해교전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고 남북대화를 제의하기도 하고 러시아를 통해 미국 일본과 조건없이 대화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등 북한의 준비는 철저했다. 북한의 적극적인 대화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런 북한의 태도가 한국 미국 일본 등 주변국의 대북정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점검해본다.》

◈남북관계◈

최성홍 외교통상부장관(오른쪽)이 이고리 이바노프 러시아 외무장관 - 반다르세리베가완AP연합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외무장관회담 기간에 성사된 북-미 대화재개 합의는 남북관계 개선에도 날개를 달아줄 게 분명해 보인다.

특히 8월 안으로 예정된 7차 남북장관급회담, 8·15민족통일대회 등에서 남북이 가시적인 성과를 낼 경우 ‘예상 외의 급류’를 탈 가능성도 없지 않다. 정부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지만 내심 이산가족 상봉을 비롯해 경의선 연결로까지 이어지기를 희망하는 눈치다.

정부가 예상 외의 급류까지 기대하는 이면엔 남북관계 및 북-미관계의 흐름이 과거와는 다르다는 판단이 작용하고 있다.

과거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움직임은 반비례 곡선 형태를 보여왔다. 북-미관계 개선만이 체제유지의 관건이라고 생각하는 북측은 항상 ‘통미(通美)’를 우선해 왔고, 대미관계에서 뭔가 풀리지 않을 때만 남북대화에 나서곤 하는 행태를 되풀이해 왔다.

하지만 조지 W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에는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서로 유사한 궤적을 보이는 등 상황이 달라졌다. 부시 행정부가 남북관계 개선 정도를 북-미관계 개선의 판단자료로 삼아왔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가 1일 대북특사 파견 시기를 한국 일본과의 협의 및 남북대화의 진전 여부에 맞춰 결정할 것이라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주변정세의 흐름뿐만 아니라 북한은 남북 및 대외관계 개선에 나서지 않을 수 없는 내부적인 필요성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는 게 정부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7월부터 물가개혁 등 경제변혁을 추진하고 있는 북한으로서는 외부사회와의 단절이 경제개혁의 실패로 직결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북한이 서해교전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 것이나, 장관급회담 실무접촉 일자를 제안한 우리 대북 전화통지문에 대해 이례적으로 5시간 만에 호응하고 나선 것도 그런 내부상황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물론 남북관계가 얼마나 진전될지는 2일부터 시작되는 실무접촉과 장관급회담 본회의를 지켜본 뒤에야 가늠할 수 있다. 우리가 서해교전에 대한 북측의 사과 및 재발방지를 어느 정도 수위로 요구할지도 변수다.

반다르세리베가완(브루나이)〓김영식기자 spear@donga.com

▼“김정일 때문에 슬픈사람은 DJ”▼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의 ‘예측 못할 행동’으로 특히 슬픈 사람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라고 지난달 31일 파이낸셜타임스 독일판이 보도했다.

타임스는 최근 북한의 대화 제의가 근본적인 정책 변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면서 “비극적 연극에서 또 하나의 삽화를 만드는 데 지나지 않는다”면서 이같이 전했다. 신문은 “독재자 김정일 위원장은 김 대통령에게 악수를 제안하다가도 마지막 순간 손을 뿌리치는 일을 되풀이해 왔다”며 “때문에 가장 슬픔을 맛본 사람은 한국이 낳은 최고의 대통령이라고 평가받는 김 대통령”이라고 전했다.

이어 신문은 “김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등 국제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국내적으로 인기를 끌어내는 데 이를 효과적으로 이용하지 못했고, 애석하게도 햇볕정책은 큰 성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김 위원장에 대해서는 “김 대통령의 훌륭한 정치 이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인물”이라며 “북한에서 신격화되듯이 백두산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시베리아에서 출생했으며 국제사회에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고 평가했다.

또 “그의 최대 목표는 아버지의 유산을 계승하는 일로 보인다”면서 “그가 개혁노선을 추구할 것이라는 소문에도 불구하고 아직 구체적 행동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베를린연합

◈북-미관계◈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왼쪽)과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시아태형양 담당 차관보 - 반다르세리베가완(브루나이)AP연합

미국은 콜린 파월 국무부장관과 백남순 북한 외무상간의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회동 이후 북한과의 대화 재개 여부를 신중히 검토하고 있으나 북한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 한 급속한 관계개선은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달 30일 북-미 외무장관 회동이 끝난 뒤 백 외무상이 즉각적으로 북-미 대화 재개에 합의했다고 밝힌 반면 미국은 이에 관해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워싱턴포스트는 1일 ‘북한과의 커피’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파월 장관과 백 외무상이 브루나이에서 15분간 커피를 마시며 회동한 것이 교착상태에 빠진 양국관계의 돌파구를 만들었다고 평가하면서도 “새로 재개된 대화가 계속 이어질지는 불분명하다”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미국이 요구하고 있는 북한의 미사일 수출 중단, 재래식 군비의 휴전선 후방 이동, 제네바 합의에 따른 핵동결 이행 여부 사찰 등이 북한으로선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

포스트는 “북한과 미국의 관계 개선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북한에 대해 회의적인 조지 W 부시 행정부에 그가 대량살상무기 수출을 포기하고 핵시설에 대한 국제사찰을 허용하며 휴전선의 긴장을 완화한다는 것 등을 설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북한 변수 외에도 미국 외교안보팀 내부에서 대북 대화 재개의 방안과 시기 등에 대한 합의가 쉽게 이루어질 수 있을지도 사실은 장담키 어렵다. 외교를 담당하는 국무부는 북한과의 대화를 강조하지만 백악관 국방부 등의 판단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워싱턴의 한 한반도 전문가는 “서해교전은 북한을 회의적으로 보는 강경파들에게 힘을 실어줬지만 북한이 이에 대해 예상보다 빨리 유감을 표명한 것은 온건파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며 “도발과 유감 표명 중 어느 쪽을 북한의 진의로 보느냐에 따라 대북대화의 향배가 달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파월 장관은 아시아 8개국 순방을 마치고 4일 귀국하므로 이번 북-미외무장관 회동에 대한 미국의 평가와 대북특사파견 재개 여부 결정 등은 빨라야 다음주 이후에나 가닥이 잡힐 것으로 예상된다.

워싱턴〓한기흥특파원 eligius@donga.com

◈북-일관계◈

백남순 북한 외무상(왼쪽)과 가와구치 요리코 일본 외상 - 반다르세리베가완(브루나이)연합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의미 있는 회담이었다.”

지난달 31일 브루나이에서 열린 북-일 외무장관회담이 끝난 후 가와구치 요리코(川口順子) 일본외상은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2년 만에 이뤄진 이번 외무장관회담에서 국장급 협의를 이달중 개최키로 합의함에 따라 오랫동안 교착상태에 빠졌던 북-일수교 교섭이 빠른 속도로 진전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특히 공동발표문에서 그동안 일본측이 수교교섭의 전제조건으로 요구해온 ‘북한의 일본인 납치 의혹’ 해결에 노력하겠다고 합의한 것은 북한측이 성의를 표한 것으로 평가된다. 북한은 그동안 일본의 ‘납치의혹’ 제기에 크게 반발해왔으나 이번 회담에서는 가와구치 외상이 ‘납치’라는 말을 사용했는데도 백남순(白南淳) 외무상은 그냥 넘어갔다.

또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 지난달 28일 북한을 방문한 이고리 이바노프 러시아 외무장관에게 “일본과 전제조건 없이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말한 사실이 전해지면서 북-일 수교협상 재개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도 1일 북-일 외무장관회담 결과에 대해 “일본은 북한과의 국교 정상화를 진지하게 추진해 왔으며, 북한이 이런 일본의 메시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표시”라고 평가했다.

일본 외무성 관계자는 북한이 유화자세로 전환한 데 대해 “경제 외교 양면에서 상당히 쫓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미국 등의 강경책으로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가운데 탈북자가 속출하고, 경제상황도 악화되고 있어 국제사회의 지원을 얻어내기 위한 포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측이 북-일수교만큼 비중을 두고 있는 납치사건 해결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신중론도 적지 않다. 그동안 북한이 일본과의 협상 테이블에 나섰다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태도를 바꾼 적도 있기 때문에 ‘일본이 다시 식량지원만 해주고 실속은 얻어내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경계론도 있다. 일본측은 북한이 북-미관계 진전상황에 따라 언제 어떻게 강경노선으로 돌아설지 모른다는 우려도 하고 있다.

도쿄〓이영이특파원 yes202@donga.com

한반도 주변정세 변화방향 예상
남북관계북-미관계북-일관계
관계개선 출발점장관급회담 실무접촉(2∼4일)뉴욕 실무접촉(8월 초)국교정상화 교섭 위한 실무협의(8월 초순)
주요 전환점7차 장관급회담(8월중순)켈리 특사 방북(8월중 ?)국교정상화 회담 본회의
주요 변수서해교전 사과 여부미국 대북특사 파견 시기국교정상화 협상, 적십자회담 구체적 일정 합의
관계 진전시 전망군사 신뢰구축 협의, 경의선연결, 이산가족 상봉대량살상무기, 제네바합의 이행, 재래식 군비 등 협의요도호 납치범 인도, 행방불명자 납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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