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日 17일 정상회담]韓-日 전문가 분석

  • 입력 2002년 9월 1일 18시 56분


▼스즈키 노리유키 라디오프레스 이사▼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는 17일 평양을 방문,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과 역사적인 회담을 갖는다.

1991년 시작된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은 2000년까지 본교섭을 11차례나 거듭했지만 지금까지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오히려 미사일 발사, 일본인 납치의혹, 괴선박문제 등의 현안이 잇달아 발생하면서 실무 협의로는 타개할 수 없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따라서 ‘톱(정상)의 정치적 의사’로밖에는 해결할 길이 없다는 공통 인식이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으로 이어졌다.

북한이 방북 제의를 받아들인 것은 북-일관계 개선뿐만 아니라 북한 외교전략과 경제사정에 더 큰 요인이 있다.

북한 외교전략의 최종 목표는 미국이다. 안보면에서 북한의 최대 위협은 주한미군이다. 북한은 1974년부터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돌리는 교섭을 요구해 왔다. 북한은 빌 클린턴 정권 때도 한국, 일본과의 대화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대미정책 일변도로만 치달았다. 대미관계를 개선하지 않으면 한국, 일본도 움직일 수 없다고 판단했고 마침 미국도 적극적으로 대화에 나섰다.

그러나 조지 W 부시 정권 출범 후 미국의 정책은 갑자기 바뀌었다. 북한에 대해 대량살상무기 개발 확산의 정지, 통상병력의 삭감, 핵사찰 실행 등을 밀어붙이는 한편 ‘클린턴식 양보’나 보상은 제시하지 않았다.

북-미관계에 더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것은 지난해 9월의 동시다발 테러사건(9·11테러)이다. 북한과 클린턴 정권은 2000년 당시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제외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테러사건 발생 후 사정이 달라졌다. 미국은 대(對)테러전쟁을 내걸고 대량살상무기를 확산하고 있는 국가들에 창을 겨눴다. 부시 대통령은 1월 일반교서 연설에서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 가능성이 높아지자 북한은 ‘다음은 우리’라는 공포감을 갖게 됐다.

북한은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강화를 추진하고 지난달 남북 각료급회담에 참석했다.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을 받아들인 것도 이런 외교전략의 흐름이다. 주변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미국의 공격을 피하고 또 이달 말 대미교섭에 앞서 정치적 보험을 마련하겠다는 의도다.

북한경제는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침체를 계속하고 있다. 1995년 이후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공산권 해체, 무리한 농업정책, 낙후된 공업기술, 노동의욕 저하 등 부정적인 유산이 누적된 결과다.

국민 배급이나 상품공급이 어려워지자 북한 주민은 시장원리가 지배하는 농민시장(자유시장)에 의존하게 됐다. 그 결과 공정가격과 암시장가격의 이중가격이 발생하고 외화가치가 급등해 원화가 기능을 잃게 됐다.

7월 시작된 물가 및 급여 인상 등의 개혁은 이런 상황을 인식한 조치다. 원화 가치가 없으면 인센티브 효과는 거둘 수 없다. 그러나 통화 가치는 실제 무엇을 살수 있는가로 결정된다. 충분한 상품 공급이 없으면 물가가 급등해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이 개혁을 성공시키려면 평화로운 주변환경과 외부 지원이 필요하다. 북한은 일본을 통해 보상을 얻겠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대일관계가 개선되면 인도적 지원도 기대할 수 있다. 북한측은 일본이 주장하는 경제협력방식에 의한 과거청산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보일 수도 있다.

최대 걸림돌은 일본인 납치 문제다. 여기서 진전이 없으면 일본 여론은 북-일 국교정상화를 반대할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도 이를 잘 알고 있다. 납치문제 진전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방북 결단을 내릴 수 없다. 따라서 북한이 뭔가 사인을 보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강성윤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전 북한학회장▼

1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평양을 방문해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개최키로 합의한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북-일관계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일이다. 워싱턴발 평양행 비행기가 격납고에 들어가 있는 상황에서 도쿄발이 이륙한다는 것은 양국관계뿐만 아니라 한반도 정세에도 엄청난 판도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이번 북-일정상회담은 그간 양국이 관계정상화를 위해 12년을 소비하면서 얻은 지혜의 결과다. 현안 해결의 방법은 오직 ‘정치적 결단’이며 지금이 그 시점이라는 데 인식을 공유했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고이즈미 총리의 평양방문이라는 정치적 결단과 더불어 일괄타결을 시도하자는 데 양국이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정상회담을 통해 그간 쟁점이 돼온 일본인 납치문제와 사과보상 문제가 정치적으로 일괄타결되면 양국간의 수교회담은 급물살을 탈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평양행에서 보았듯이 현 단계에서 모든 문제가 합의 해결될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합의사항과 이행 과정도 지켜봐야 한다. 이런 점에서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이 정치생명을 담보로 한 도박이란 말도 나오는 것이다.

그동안 고이즈미 총리는 “납치문제의 해결 없이는 국교정상화도 없다”고 공언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이즈미 총리가 평양을 방문키로 정치적 결단을 내린 데는 ‘납치 문제의 선(先)해결 요구가 과연 국익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현실적 판단도 작용했을 것이다.

모든 국가가 북한과 수교하는 현실에서 일본만이 국제정세의 흐름을 거부할 수 없다는 인식도 크게 작용했다.

또 한반도 주변의 중국과 러시아가 남북 양국과 관계를 정상화한 상황에서 일본만이 북한과 비정상적인 관계를 지속한다는 것은 한반도에서의 영향력 약화를 가져올 것이며 향후 6자회담을 거론할 명분이 군색해진다는 점도 고려했을 것이다. 물론 장기적으로는 수교를 통해 안보문제를 해결하고 가시적인 성과를 얻어 국내정치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어가겠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일본 총리의 정치적 결단에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대목은 그간 일본의 대북정책은 한미일공조의 틀 속에서, 그 중에서도 미국과의 긴밀한 공조 아래 전개돼 왔다는 점이다.

고이즈미 총리가 평양을 방문하기에 앞서 12일 뉴욕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할 예정인 만큼 자연스럽게 대북 공조문제가 논의될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북-미 관계를 고려할 때 이번 방북 결정은 보수화의 물결 속에서 외교의 독자성을 모색하려는 일본의 주체적 대북외교의 시발이 아닌가 하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북-일 정상회담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미국에 ‘지금처럼 계속 지켜만 보는 것이 괜찮은가’라는 새로운 질문을 던져 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튼 북-일정상회담을 통해 양국이 관계 정상화의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다면 남북관계에도 활력을 줄 뿐만 아니라 김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 환경을 조성하는 데도 일조할 것이다. 더불어 일본에서 차별대우를 받고 있는 총련계 동포들의 지위 향상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의 평양 방문은 적대적인 북-일 외교사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 역사적인 회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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