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00년 10월 러시아대사관의 외교 업무차 두 번째로 북한을 방문했다. 그해 3월까지 나는 한국의 고려대 국제지역원의 방문교수로 재직했기 때문에 시차 없이 남한과 북한을 동시에 비교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 시베리아, 중국 북서부를 거쳐 북한에 도착했다. 국경을 넘은 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도시는 신의주였다. 6·25전쟁 때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건설된 철교의 양쪽에 위치한 북한과 중국의 분위기는 너무나 달랐다.
한국의 전통양식을 응용한 현대적 조형물이 많이 들어선 평양은 옛날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도시였다. 거리는 과거와 같이 놀랍도록 깨끗했다. 공원들도 아름다웠다. 모스크바나 서울과 비교했을 때 평양은 인구와 차량 통행이 매우 적었다.
평양 도착 후 나는 아내에게 대학생 때 내가 방문했던 아름다운 장소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곳들은 과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거의 매일 저녁 고요하고 거대한 수면을 바라보며 우리는 대동강을 거닐었다. 모터보트가 떠다니고, 낚싯대를 드리우거나 조개를 줍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 강을 도심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웠다. 평양 시민들이 대동강 주변의 공원에서 유럽인들처럼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모습도 신선했다.
평양 도착 후 첫 일요일에 나와 아내는 김일성종합대를 걸어서 방문했다. 그곳을 방문하니 학창시절에 대한 향수가 밀려들었다. 가장 또렷한 기억은 1979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사망했을 때 룸메이트이기도 했던 북한 학생들이 한 방에 모여 축배를 들던 모습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최대 적이 죽은 날”이라며 맘껏 기뻐했다.
그러나 올 여름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과 박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朴槿惠) 의원이 만난 것과 박 전 대통령이 이룬 많은 업적을 생각할 때 서울과 평양의 관계가 그동안 얼마나 많이 발전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한반도와 북한은 변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던 그동안의 전망들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김일성종합대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은 매우 아름다웠지만 전력 부족을 여기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평양 시민들의 친절을 느낄 수 있었다. 지하철 입구에서 나는 안내원에게 어디서 토큰을 구입해야 하는지 물었는데 그녀는 우리가 토큰 없이 개찰구를 통과할 수 있도록 해줬다. 너무나 고마웠다. 한반도가 처음인 아내는 감동했다. 아내는 북한 주민들의 친절과 음식, 도시 그 자체를 모두 좋아했다.
2001년 가을, 윤이상의 이름을 딴 평양의 한 콘서트홀에서 클래식 페스티벌이 열렸다. 나는 거기에서 윤이상의 음악을 처음 들었다. 그에 대해선 여러 가지를 많이 읽었기 때문에 그의 음악이 대단히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중도 많았다.
또 인상적이었던 것은 부처를 얘기하는 북한인들이었다. 20여년 전 소련에 온 북한 관리들은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에 종교가 널리 퍼져 있는데 의아해 하면서 북한인들은 100% 무신론자라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은 북한 사람들이 부처 얘기를 하고 있었다.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던 것이다.
정리〓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