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는 북한의 핵개발 계획 시인과 관련, 29일 말레이시아에서 갖기로 한 북한과의 수교교섭은 예정대로 열되 일본인 납치 문제와 함께 이 문제를 회담의 최우선과제로 삼기로 17일 결정했다.
또 미국과 연대해 북한에 핵개발 계획을 즉시 중지하도록 요구하고 북한이 이에 응하지 않는다면 국교 정상화 교섭을 중지하는 방안도 고려하기로 했다.
이와 관련,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관방장관은 이날 오전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핵개발 계획은 94년 체결된 경수로 협정에 명백히 위배되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앞으로 진행될 수교 교섭은 핵개발 문제에 대한 북한의 향후 태도와 밀접하게 연관될 것임을 밝혔다.
후쿠다 장관은 이어 지난달 17일 북-일 정상회담 직전 미국으로부터 북한이 비밀핵무기 개발 계획을 시인한 사실을 통보받았다고 공개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자세한 정보는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후쿠다 장관은 일본 정부가 이 같은 사실을 통보받고도 북-일 정상회담을 예정대로 진행한 이유로 “정상회담이 지역 안보에 기여할 것이라는 생각과 일본인 피랍자 문제 해결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중국▼
중국 정부는 17일 북한이 핵무기 개발 계획을 시인한 것과 관련해 “중국은 한반도가 비핵화돼야 하며 평화와 안정이 유지돼야 한다는 명확한 입장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장치웨(章啓月)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 브리핑을 통해 “북한의 핵 개발 프로그램에 대해 구체적인 것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장 대변인은 이어 “한반도 문제는 대화와 협상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돼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 관련 당사국은 정치적으로 좋은 분위기를 만들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중국을 방문중인 북한 대표단이나 평양 당국과 이 문제를 긴급 논의했느냐는 질문에는 “북한 대표단은 양국간 우호협력 관계를 위해 중국에 왔으며 오늘 상하이(上海)로 갔다”고만 말했다.
도쿄〓조헌주특파원 hanscho@donga.com
베이징〓황유성특파원 yshwang@donga.com
▼제네바합의 재협상 불가피, 경수로건설 일시중단 될듯▼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진행했다’고 시인함에 따라 북한의 핵 개발을 통제하는 기본틀인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의 운명이 중대한 고비를 맞고 있다. 또 제네바 합의에 따라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북한에서 진행 중인 경수로 건설 사업도 차질을 빚을 것으로 보인다.
▽제네바 합의의 운명〓17일 미국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북한은 90년대 말 농축우라늄을 생산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해 “원자로 가동 및 건설 등 핵 활동을 동결한다”는 제네바 합의 사항을 정면으로 위반했다.
하지만 미국이 제네바 합의를 일방적으로 백지화하지는 않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통일연구원 허문영(許文寧) 선임연구위원은 “미국이 ‘북한과 대화하지 않겠다’며 강경 대응하고 있지만, 북한 길들이기 차원의 엄포로 본다”고 말했다. 또 제네바 합의를 무효화할 경우 북한의 핵 개발을 통제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현실론도 제네바 합의 완전 무효화의 가능성을 낮게 만들고 있다.
물론 미국 정부 내 강경세력이 힘을 얻을 경우 ‘완전 파기’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제네바 합의가 파기되지 않더라도 북한의 핵 개발 시인으로 ‘북한의 핵 개발 중단’이라는 대전제 아래 만들어진 제네바 합의는 재협상 과정을 거쳐 손질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통일연구원 정영태(鄭永泰) 박사는 “북한이 핵 보유 여부는 밝히지 않았지만, 제네바 합의는 새로운 합의로 대체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경수로 건설은 일시 중단”〓북한의 핵 개발 시인으로 북한의 핵 개발 중단 및 핵사찰 수용을 전제로 진행 중인 경수로 건설 사업이 일시적인 공사중단 등 타격을 입게 됐다.
총 40억8000만달러를 투입해 함경남도 신포 금호지구에 100만MW짜리 발전시설 2기를 제공한다는 경수로 사업은 현재 원자로가 들어설 건물의 기반 콘크리트 공사를 완료하는 등 총 공사의 24%가 진척된 상태.
그러나 전문가들은 북한의 핵 개발 시인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미국 정부가 건설단을 철수시키는 등 초강경 대응은 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허 선임연구위원은 “공사가 일시 중단되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사업단 철수 등 극약처방은 없을 것이다”고 내다봤다. KEDO는 향후 북-미간 협상과정을 지켜보면서 고속도로 건설 등 곁가지 공사를 진행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김승련기자 srkim@donga.com
▼외신반응▼
미 백악관의 스콧 스탠자이 대변인이 16일 밤(현지시간) 북한의 핵 개발계획 시인을 발표한 이후 AP AFP 로이터 UPI 등 세계 4대 통신은 하루 동안 수백 건의 북한 관련 외신을 타전했다.
백악관은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가 북한을 다녀온 이후 12일 동안 비밀을 지켜왔으나 USA투데이가 17일자 특종보도를 하려 하자 부랴부랴 일과시간이 끝난 밤에 발표했다.
북한 관련 뉴스는 즉각 미국 주요 언론의 인터넷에서 이라크와 워싱턴 연쇄살인 사건을 밀어내고 머리기사를 차지했다. 미국뿐 아니라 러시아의 NTV, 영국의 BBC방송과 일간지 인디펜던스, 파이낸셜 타임스, 파리에 본부를 둔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과 일본의 주요 언론도 모두 머리기사로 북한 뉴스를 보도했다.
외신들이 이처럼 화급히 그리고 심각하게 북한 핵 개발계획 시인을 타전한 것은 “북한의 폭로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사건(jaw-dropper)”(워싱턴포스트)이었기 때문.
외신들은 핵 개발계획을 시인한 북한의 태도에 초점을 맞췄다. 미 언론들은 미 관리들의 말을 인용해 “전혀 사과하는 빛이 없이 호전적이었다”(뉴욕타임스), “단호했고 공격적이었다”(워싱턴포스트)고 전했다.
이번 폭로가 전면적인 북-미의 군사적 대치로 갈 것인지 아니면 북한의 의도가 미국과 평화교섭을 벌이려는 것이어서 대화국면으로 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CNN방송은 이날 ‘한국 폭탄’이라는 제하의 보도를 통해 “부시 행정부는 이 문제를 한국 일본 등 동맹국들과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대처하겠다고 말했다”면서 “아직까지 북한에 정면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민영 NTV는 “북한이 비확산 의무를 거부한 사실은 북-미 관계의 악화는 물론 남북 대화와 북-일 대화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관영 이타르타스 통신은 미국도 1994년 제네바 기본합의에서 약속한 경수로 건설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29일 북한과의 수교 교섭을 갖는 일본에선 교도통신이 백악관의 발표시기를 놓고 “수교 교섭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다”고 의구심을 제기했다.
홍은택기자 euntack@donga.com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 kimki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