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핵 의혹에 대해 시인도 부인도 않는 NCND(Neither Confirm, Nor Deny) 정책으로 일관해왔던 북한이 조지 W 부시 미국 공화당 행정부와 첫 북-미 대화 자리에서 ‘비밀 핵개발 프로그램’의 존재를 인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북한의 의도에 대해 미국은 ‘벼랑 끝 전술’로 보는 반면 우리 정부는 대화 제스처로 해석, 앞으로 대응방안을 놓고 한미간에 이견이 불거질 가능성이 있다.
▽“벼랑 끝 협박이다”〓리처드 바우처 미 국무부 대변인은 성명에서 “북한은 미국을 비난하려고 했으며 북-미 제네바 합의가 무효가 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은 북한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를 다분히 ‘도전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북한은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에도 94년의 제네바 합의와 2000년 10월 빌 클린턴 전 행정부와 체결한 ‘북-미 공동 코뮈니케’를 북-미 관계의 핵심적인 2대 틀로 강조해왔다.
특히 부시 행정부가 ‘북-미간 적대관계 청산’을 명문화한 ‘코뮈니케’를 인정하지 않자 북측은 “부시 행정부가 대북 적대시 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며 강하게 비판해왔다.
그랬던 북한이 양국의 기본틀을 부정하는 태도를 보인 것은 이제부터는 극한 상황도 마다하지 않는 ‘벼랑 끝 전술’을 펴겠다는 신호탄으로 봐야 한다는 게 부시 행정부의 해석이다.
북측이 북-미 대화 첫날인 3일에는 핵 문제를 부인하다가, 4일 공격적인 시인으로 태도를 바꾼 것도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자세를 확인한 뒤 ‘더 이상 밀리면 안 된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외교부의 한 당국자는 사견을 전제로 “북측이 핵 위력을 과시하며 ‘벼랑 끝 전술’을 펴는 것이라면 7000만 한민족의 생명을 담보로 또다시 ‘큰 도박’을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대타협의 제스처인가〓우리 정부는 북-일 정상회담(9월17일)의 연속선상으로 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희망 섞인 분석을 내놓고 있다.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 북-일간의 오랜 현안인 일본인 납치 문제를 인정하고 사과함으로써 북-일 정상화 교섭의 물꼬를 튼 것처럼 미국의 최대 관심사인 핵 문제를 솔직히 인정한 것은 그만큼 해결의 의지가 있다는 반증이라는 것이다.
임성준(任晟準) 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과 외교부 고위당국자 모두 17일 이 같은 해석을 내놓았다. 그러나 임 수석은 “대타협 제스처라는 해석은 미국도 같은 생각인가”라는 질문에 “깊이 있게 논의한 바 없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외교 소식통은 “북측은 미국이 대북 적대정책과 경제제재 등을 철회하면 핵 미사일 재래식 무기 같은 안보 현안을 한꺼번에 해결하겠다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과정에서 비밀 핵 프로그램을 시인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체제를 유지하며 개혁 개방 정책을 수행하는 데는 미국과 적대관계를 해소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는 점도 이런 분석의 근거이다.
부형권기자 bookum9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