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우라늄 농축 방식이라는 북한의 새로운 핵 프로그램 존재 사실이 공개된 뒤에도 주무 부처인 외교통상부 당국자들은 “북한의 핵개발 문제는 평화적으로 해결돼야 한다는 데 한미 양국 정부의 견해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며 ‘늘 해오던 말’들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워싱턴에서는 ‘제네바 합의 파기 결정’ ‘대북 중유지원 중단 방침’ 같은 강경한 대북 압박정책들을 예고하는 미 행정부 고위관리들의 발언이 잇따르고 있다. 외교부의 한 당국자는 20일 “미국이 평화적 해결을 모색한다고 했으니까 천천히 진행할 것이다. 서두르지 말고 길게 보자”며 “북핵 문제에 대한 단계별 대응책은 아직 준비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의 반응이 나오지도 않은 상태에서 언론이 하루하루의 변화를 너무 민감하게 보도하고 있다는 불만도 터뜨렸다.
또 미국의 유력한 언론들이 “북한이 이미 제네바 합의 등 국제조약을 어겼으므로 새 협약에는 무조건적이며 강력한 구속력을 지닌 (핵)검증 조항이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많은 외교전문가들까지 “새로운 북-미 핵합의 체제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데도 정부 관계자들은 “그럴 가능성이 있다 해도 나중의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부의 이런 인식은 미 언론의 보도 내용을 애써 무시하거나 평가절하하려는 태도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청와대와 정부 관계자들은 ‘미 행정부가 제네바 합의를 파기하기로 결정했다’는 뉴욕타임스지 보도와 관련해 “전혀 사실이 아니다. 외교 채널을 통해 공식 통보받은 바 없다” “공화당 강경파의 언론플레이일 가능성이 크다”는 발언만 되풀이하고 있다.
심지어 한 고위 외교당국자는 21일 “‘북한측의 시인으로 제네바 합의가 파기됐다’는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의 언급은 북한이 먼저 무효화됐다고 말하니까 그렇게 본다는 것이지 미국이 합의를 파기하겠다는 뜻은 아니다”는 ‘아전인수(我田引水)격 해석’까지 내놓았다.
제성호(諸成鎬) 중앙대교수는 “국민의 생존과 한반도의 운명이 달린 문제를 정부의 몇몇 사람이 은폐하거나 좌지우지해선 안된다. 미국의 정확한 의도를 빨리 파악해 속히 해결책을 마련하고 국회와 국민, 언론에 소상히 설명해 동의를 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 관리들의 북핵 파문 관련 발언 일지 | |
10월17일 | △북한 핵문제를 포함한 모든 문제는 대화를 통한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돼야 한다(이태식 외교통상부 차관보) △이미 8월 초 미 정보 관계자들이 극비 방한해 북한의 핵개발 의혹을 알려왔다(정부 관계자) |
10월18일 | △북한이 농축우라늄을 이용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내용을 접한 것은 8월 이후였다(최성홍 외교부장관) △현재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정부 당국자) |
10월19일 | △한미간에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 차이는 없다. 문제의 심각성과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는 중요한 문제라는 인식에 차이가 없다(고위 당국자) |
10월20일 | △미국이 제네바 합의를 파기, 경수로 건설을 중단한다는 통보를 못 받았다 (장선섭 경수로기획단장) △제네바 합의 파기 여부는 26일 한중일 협의를 거쳐 결정될 것이다 (정부 당국자) |
10월21일 | △한미간 이견은 없다. 미국은 우리의 포용정책 및 남북합의의 이행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냉철하게 대응해야 한다(고위 외교당국자) △파월 장관의 ‘제네바 합의 파기’ 발언은 협상 당사자인 북이 ‘파기됐다’고 말한 데 대한 냉소적인 반응일 뿐이다(청와대 고위 관계자) |
이종훈기자 taylor5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