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측 수석대표인 정세현(丁世鉉) 통일부장관이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까지 세워놓고 북한 핵 파문에 대한 구체적인 해명과 핵 관련 국제협약 준수 약속을 북측에 요구했으므로 일단 ‘강력한 문제제기’는 한 셈이다.
그러나 공동보도문에 담긴 문구는 ‘핵 문제를 비롯한 모든 문제를 대화의 방법으로 해결하도록 적극 협력하기로 한다’는 극히 원론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남북이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에 합의함으로써 한반도의 위기가 확산되는 것을 막았다는 평가도 없지 않지만, 미국의 즉각적인 핵개발 포기 요구 및 제네바합의 무효화 공세를 누그러뜨리기에는 미약해 보인다.
이 때문에 정부 일각에서는 북한 핵 문제가 어차피 장관급회담 차원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 만큼 대표단은 처음부터 실제적인 핵위기 돌파구 마련이 아니라 ‘여론을 의식한 문제제기’에 주력하는 선에서 회담방향을 정리하고 올라간 것이 아니냐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탐색전의 결과는?〓북한이 현 상황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도 이번 장관급회담의 주요 목표 중 하나였다. 그러나 정부의 의도는 달성하지 못했다.
정 장관은 23일 북한 김영남(金永南)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미국이 적대시 정책을 철회할 ‘용의’가 있다면 미국이 우려하는 안보상 문제를 해소하겠다”고 한 말을 상기시키며 “북한이 ‘철회한다면’에서 ‘철회할 용의가 있다면’이라는 입장으로 한발 물러섰다”고 평가했다.
북측도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을 희망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긍정적인 대목이라는 것이다. 또 북한이 미국과의 협상카드로 활용해 오던 핵 문제를 남북간에 협의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도 의미가 없지 않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그러나 오히려 북측이 방어에 성공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은 북측의 카드가 아니라 한국이나 미국이 내놓을 카드라는 점에서 그렇다. 제네바합의를 어긴 북한이 ‘대화의 전제’로 먼저 해야 할 일은 핵개발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일이지만 북한은 이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은 채 회담을 마쳤다.
▽꼬이는 해법〓정부 당국자는 23일 “북측이 대화를 통한 해결 의지를 분명히 한 것과 남북대화가 사태 해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게 큰 성과”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미일 협의를 담당하고 있는 외교통상부는 남측 대표단이 미국을 설득할 만한 확실한 명분을 얻어내지 못한 데 대해 아쉬움과 곤혹스러움을 내비치고 있다.
외교부 관계자는 “최선을 다한 것 같다. 하지만 그 정도의 원칙적 합의로는 중유제공과 경수로사업의 중단 같은 강공책을 고려 중인 미국을 달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또 핵 문제에 골몰하느라 국군포로 및 납북자 문제, 국방장관 회담개최 문제 등 다른 현안들에 대해서도 별다른 진전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김영식기자 spear@donga.com
이종훈기자 taylor55@donga.com
▼남북장관급회담 공동보도문<전문>▼
제8차 남북장관급회담이 2002년 10월 19일부터 22일까지 평양에서 진행됐다. 회담에서 쌍방은 최근 남북관계가 6·15 공동선언의 기본정신에 부합되게 좋게 발전하고 있는 데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남북공동선언을 이행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며 당면한 문제들을 풀어나가기 위해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1.남과 북은 6·15 공동선언의 정신에 맞게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하며, 핵 문제를 비롯한 모든 문제를 대화의 방법으로 해결하도록 적극 협력하기로 한다.
2.남과 북은 경의선과 동해선 철도·도로 건설이 동시에 빨리 진척되도록 장관급 회담을 적극 추진하기로 한다. 쌍방은 1차적으로 경의선 철도·도로를 개성공업단지에, 동해선 철도·도로를 금강산 지역에 연결한다. 쌍방은 동해선 철도 연결공사를 빨리 추진하며, 남측은 강릉 방향에로의 남측 구간 연결 공사를 중단 없이 빨리 추진시킨다.
3.남과 북은 개성공단 건설 착공을 12월 중에 하는 문제와 건설과 관련한 실무적 문제들을 개성공단건설실무협의회에서 토의하기로 하며, 개성공단이 건설되면 그 안에 남측의 해당 부문 사무소를 설치하기로 한다.
4.남과 북은 쌍방 민간선박들의 상대측 영해통과와 안전운항 등 해운협력에 관한 해운합의서 채택을 위한 관계자 실무접촉을 11월 중에 금강산에서 갖기로 한다.
5.남과 북은 상대측의 인원통행 및 물자수송에 관한 통행합의서 채택 문제를 남북 철도·도로가 처음 연결되는 시기에 맞춰 협의하기로 한다.
6.남과 북은 남측의 어민들이 북측의 동해어장의 일부를 이용하는 문제와 관련해 해당 실무접촉을 빠른 시일 내에 금강산에서 갖기로 한다.
7.남과 북은 이산가족들의 금강산 면회소를 빨리 건설하고, 전쟁시기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자들의 생사·주소를 확인하는 적십자단체들의 사업을 적극 밀어주기로 한다.
8.남과 북은 제9차 남북장관급회담을 2003년 1월 중순에 서울에서 개최한다.
2002년 10월 22일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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