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대표적인 사례가 97년 대선 하루 전날(12월 17일) 사망한 당시 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 후보 친동생 대의씨의 경우.
DJ를 위해 매일 새벽미사를 올리며 불철주야 뛰어다녔던 대의씨는 지병인 간경화에 과로가 겹쳐 그해 10월 쓰러졌는데 숨을 거두기 전 부인과 가족에게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임종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유언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특히 김 후보의 당선이 확정된 19일부터 주요 그룹 회장들이 조화를 보내 애도했고 사회 각계 인사들의 문상행렬이 줄을 이어 DJ의 바뀐 위상을 실감케 했다.
92년 대선을 1년4개월여 앞둔 91년 8월엔 당시 김영삼(金泳三·YS)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의 최측근이던 김동영(金東英) 전 정무1장관이 3년간의 암투병 끝에 사망했다.
30년 동안 YS의 곁을 지키며 민주화 투쟁의 선봉에 섰던 이 ‘의리의 정객’은 88년 말 통일민주당 부총재 시절 암 진단을 받았으나 가족에게조차 알리지 않은 채 5공 청산과 3당 합당 같은 정치적 격변기를 헤쳐나갔다.
그는 민자당 내 민주계의 단합을 위해 폭탄주를 불사하는 등의 초인적 의지를 보여줘 정적이던 민정계까지 감동시킴으로써 ‘YS 대세론’의 결정적인 밑거름 역할을 했다.
이종훈기자 taylor5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