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12월 어느날 권노갑(權魯甲) 전 민주당 고문의 핵심측근인 민주당 이훈평(李訓平) 의원은 일본 도쿄(東京) 뉴오타니 호텔에 머물고 있던 권노갑에게 이렇게 귀국을 채근했다.
DJ의 ‘귀국허락 사인’을 기다리던 권노갑은 마침내 무작정 귀국하기로 결심했다. 007 작전을 방불케 하는 ‘귀국작전’이 시작됐다. D데이는 12월 30일 이전. 하지만 귀국일자는 극비에 부쳐졌다.
보안유지를 위해 비행기표의 예매와 취소, 티켓 예약자 이름을 바꾸는 등 우여곡절을 거쳐 30일 권노갑은 김포공항을 밟았다. 4개월여 만의 귀환(歸還)이었다.
DJ의 ‘분신’으로까지 통했던 권노갑의 정치무대 복귀는 당시 김중권(金重權) 대통령비서실장 중심의 이른바 ‘신주류’가 장악하고 있던 청와대를 향한 투쟁적 성격이 짙었다.
97년 초 한보사건으로 수감돼 98년 8·15 특사로 사면복권되자마자 1주일 만인 8월 22일 허겁지겁 일본으로 떠난 권노갑의 당초 목적지는 아들이 있는 미국 시애틀. 그러나 미국 비자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쫓기듯 출국한 그는 결국 도쿄에서 비자를 받아 미국을 다녀온 뒤 도쿄로 돌아와 망명이나 다름없는 야인 생활을 보냈다.
권노갑의 한 측근은 그의 사면과 일본행에 대해 “정말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서울 강북삼성병원에서 형집행정지상태로 신병치료 중이던 권노갑측근은 8·15 사면복권 대상자 명단에 행여 빠질세라 “사면복권만 되면 바로 출국할 것이다”고 흘렸다. 신주류의 견제를 피하기 위한 메시지였다.
당시로선 구명도생(苟命圖生)이 최우선의 목적이었다. 권노갑은 DJ에게 사신(私信)을 보내 ‘배려’를 호소하기까지 했다. 이 부분에 대한 김중권의 설명은 이렇다. “정부 출범 초기의 일이다. 하루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어떤 편지를 나에게 주면서 읽어보라고 하더라. 당시 형집행정지로 강북삼성병원에 입원 중이던 권노갑이 대통령에게 보낸 것이었다. 편지 내용 중에는 여식이 곧 결혼하는데 거주가 제한돼 아비 역할을 못하게 됐다는 구절도 있었다.”
당시 권노갑의 편지에는 김중권을 비판하는 내용도 들어있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김중권은 이에 대해 “여러 가지 내용이 많이 포함돼 있었다”며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김중권은 이 편지를 읽은 후 권노갑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관련비서관 회의를 소집했다. 논의 결과 우선 거주제한을 풀어주고 ‘본인이 원한다면’이라는 전제 하에 일본 등에 나가 있도록 하는 방안이 마련됐다. 김중권측은 이 같은 방침을 권노갑에게 통보하면서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를 봤다”는 얘기도 함께 전했다.
한 여권 핵심 관계자는 “당시 권노갑은 김중권을 비판하는 내용이 포함된 편지가 김중권의 손에 들어간 것을 보고 상당한 위기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편지 사건은 대통령의 신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가 아니었겠느냐”고 설명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출국한 권노갑의 일본 생활은 결코 편치 않았다. 98년 10월 7일 김 대통령의 첫 도쿄 방문 때는 행여 뒷말이 나올까봐 오사카로 피신했고, 9일 김 대통령이 오사카를 방문할 때는 거꾸로 도쿄로 피신했다. 그는 수감생활과 ‘망명’ 등으로 인해 우울증 증세까지 있었다. 이훈평 의원의 증언. “형님은 거의 말이 없었다. 돌아다니지도 않았다. 하루는 호텔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 ‘이게 자의(自意) 반, 타의(他意) 반이라는 거냐’며 ‘허허’하고 쓴웃음을 지은 적도 있다.”
권노갑이 98년 일본 출국 하루 전 DJ를 만나 “가서 열심히 공부(당시 일본 게이오대에 연구원 초청을 받은 상태)하고 연말에 돌아오겠습니다”고 인사를 하자 DJ는 “잘 지내라”는 말만 했다.
DJ는 그의 출국 후 동교동계 의원들의 끝없는 ‘권노갑 귀국’ 요청에 대해 계속 부정적인 입장으로 일관했다. 권노갑의 귀국을 누가 막았느냐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다. 권노갑측은 당시 김중권-이강래(李康來) 대통령 정무수석비서관-장성민(張誠敏) 대통령비서실 상황실장 등 신주류 실세들을 지목하고 있지만 이들은 “권노갑의 귀국을 반대하지 않았다”고 반박한다.
지금은 오히려 DJ가 가장 적극적인 반대론자였다는 얘기가 설득력을 얻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이종찬(李鍾贊) 전 국정원장은 “당시에는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동교동계를 제외하면 대부분 권노갑의 귀국을 반대하는 상황이었다”고 회고했다.
동교동계의 한 축이었던 한화갑(韓和甲) 민주당 대표는 그 해 11월경 대통령 면담을 신청, “노갑이 형님을 귀국시켜야 한다”고 말했다가 DJ로부터 “자네는 정치를 그렇게 오래 했으면서 아직도 정치를 모르나”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조승형(趙昇衡) 헌법재판관도 당시 DJ를 면담, 권노갑의 신원(伸寃)을 여러 차례 요청했으나 DJ는 묵묵부답이었다.
DJ는 그만큼 권노갑의 귀국을 부담스럽게 생각했다. 한화갑은 12월 들어 DJ에게 재차 권노갑의 귀국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고 결국 DJ는 “자네 마음대로 하소. 그러나 귀국해서 조용히 있으라고 하시오”라고 ‘조건부 귀국’을 허용했다. 그러나 한화갑은 권노갑측에 이 얘기를 미처 전하지 못했고 그 과정에서 권노갑은 귀국을 독자 결행했다.
DJ가 권노갑의 귀국을 한사코 반대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분명한 것은 DJ가 신주류 중심의 국정운영에 구주류가 개입하는 것을 차단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노갑의 귀국을 조건부로나마 허용한 것은 일정부분 신주류를 견제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어쨌든 권노갑의 귀국은 구주류들에게는 일종의 ‘해방’의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귀국 당일 구주류 인사 200여명이 김포공항으로 달려나왔다.
노갑이 귀국이후 가장 먼저 손댄 것은 인사였다. 동교동계로부터는 특히 당 출신 일부 인사들이 검증절차나 대선 공헌도 등이 무시된 채 청와대의 입맛에 따라 정부산하기관에 배치됐다는 등의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김중권이 자기사람을 곳곳에 심었다’는 불만도 구주류 내부에 팽배해 있었다.
한 동교동계 인사는 “92년 대선에서 DJ가 패배하자 당사 외곽사무실 보증금 수천만원을 몰래 찾아 달아난 K씨가 정권교체의 ‘공신’으로 탈바꿈해 모 산하기관 감사로 내려간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김중권이 기자 출신인 C씨를 청와대 비서관으로 발탁한 것은 권노갑을 결정적으로 분노케 한 요인이다. 권노갑은 C씨가 기자 시절인 97년 입원 중이던 자신의 주변에 대해 공격적인 취재와 기사로 자신을 괴롭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권노갑은 99년 1월 23일 DJ와의 면담을 거쳐 국민회의 고문으로 당에 복귀한다. 그 직후부터 권노갑은 당 출신 인사들의 정부단체 산하기관 취직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당 출신 인사들의 관리를 그들의 성향을 잘 아는 권노갑으로 일원화하도록 한 것이다. 청와대에서는 동교동 출신의 행정관 J씨가 이들에 대한 검증을 전담했다.
동교동계 구파에 다시 힘이 실리기 시작했지만 그 순간부터 “권노갑이 인사를 다한다”는 얘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파워’와 ‘구설(口舌)’은 동전의 양면이었던 셈이다.
▼DJ-권노갑 소원해진 사연은▼
“묘비에 ‘김대중 비서실장’이란 직함만 새겨진다면 만족한다”며 40여년간 DJ와 고락을 함께 해온 권노갑(權魯甲) 전 민주당 고문.
그러나 권력은 두 사람의 관계마저 갈라놓았다. 그는 DJ를 보필하면서 단 한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시를 거부했다. 2001년 11월 민주당 쇄신파들이 ‘권노갑 외유(外遊), 박지원(朴智元) 대통령 정책기획수석 사퇴’를 주장하며 김 대통령을 압박했을 때 그는 “외국으로 나가라”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지시를 거부했다.
당시 권 전 고문은 청와대에서 “잠시 외국에 나가 있는 것이 어떠냐”는 DJ의 권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신문에 나오는 각종 게이트에 하나도 연루된 것이 없습니다. 나도 인생이 있고 가족이 있고 명예가 있습니다. 나갈 수 없습니다”고 단호히 거부했다.
철석같이 믿던 권 전 고문이 ‘희생양’이 되기를 거부하자 김 대통령은 결국 박 수석을 사퇴시키고 자신도 민주당 총재직을 전격 사퇴했다. 김 대통령은 사퇴 전날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권 전 고문을 지칭, “그는 이제 청와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못박았다. 그 뒤 두 사람은 지금까지 전화통화조차 하지 않고 있다.
두 사람은 거의 모든 일을
상의했지만 서로 밝히지 않은 ‘비밀’도 있었다. 권 전 고문은 93년 한보 정태수(鄭泰守) 총회장으로부터 1억5000만원을 받았지만 이를 당시 대선 패배 후 영국 체류중이던 DJ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권 전 고문은 97년 이 문제가 불거지자 “혹시 총재에게 누가 될까봐 보고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DJ도 92년 대선 직전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대선 격려금’ 20억원 수수사실을 권 전 고문에게 알리지 않았다. 서로 하나씩 주고받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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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취재팀 명단
▽팀 장〓이동관 정치부 차장
▽정치부〓윤승모 차장급기자
박성원 최영해 김영식 부형권 이승헌 기자
▽경제부〓반병희 차장
김동원 김두영 신석호 기자
▽사회부〓하종대 이명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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