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송금 반드시 밝혀야 할 이유]정권-오너 손잡고 주주이익 침해

  • 입력 2003년 2월 7일 18시 51분


작년 5월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주한 외국기업을 상대로 ‘김대중 정권의 재벌개혁’에 대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전반적으로 개선됐다’는 의견이 91%였다. 특히 주주권리 보호, 회계투명성, 경영진 책임에 대해서 70% 이상이 좋아졌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지금 다시 조사한다면 반대의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게 경제계의 지적이다. 대북 비밀송금 과정에서 주주권리가 헌신짝처럼 버려졌고 회계의 불투명성, 정치권력을 등에 업은 총수의 전횡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북 비밀송금 사건을 철저히 파헤쳐 잘못된 정경유착 관행을 이 기회에 뿌리뽑아야 한다는 게 재계 및 금융계의 바람이다.

▽대북 비밀송금에서 드러난 정경유착〓산업은행이 경제논리에 따라 현대상선에 4000억원을 대출해줬다고 믿는 금융인은 없다. 엄낙용 전 산은 총재는 작년 국정감사에서 “한광옥 대통령비서실장이 이근영 당시 산은 총재에게 전화를 했다”고 증언, 정치권력에 의한 대출이었음을 밝히기도 했다.

산업은행으로부터 4000억원을 대출받은 현대상선은 이 가운데 2억달러를 북한에 보내면서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를 거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사외이사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현대상선 고위관계자는 “모든 일은 정몽헌 회장에 의해 이뤄졌는데 우리가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금융감독원 고위 관계자도 “건설업이나 해운업처럼 리베이트 주고받기가 관행으로 정착된 업종들이 현대그룹에 상대적으로 많은데다 회계처리나 자금운영의 투명성이 다른 기업들보다 상대적으로 느슨한 편이어서 비밀송금의 파트너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문제는 철저히 무시된 주주들의 권익. 현대상선은 북한으로 보낸 2억달러에 대해 공시도 하지 않았고 재무제표에서도 통째로 누락시켰기 때문이다. 정작 기업의 주인인 주주들은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

공정거래위원회는 2000년 현대 등 4대 그룹에 대해 부당내부거래 조사를, 2002년 현대 등 6대 그룹에 대해 공시이행 점검실태 조사를 했지만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조사 결과다.

참여연대 김상조 경제개혁센터 소장(한성대 교수)은 “대북사업의 주체는 현대아산인데 현대상선이 경비를 부담했다”며 “이번 기회에 소액주주 등 피해 당사자들의 손실을 보전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밀송금 규명 없이는 개혁도 없다〓노무현 당선자의 공약집 9번 ‘재벌개혁 등 공정한 경쟁질서 확립’의 첫 번째 항목(9-1)은 ‘재벌의 정경유착 관행을 근절하고 공정한 시장질서를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수위 출범 이후 출자총액제한 강화, 증권 집단소송제 도입, 금융계열분리청구제 등에 대해서는 추진 의사를 밝히면서도 정경유착 근절에 관해서는 별 논의가 없다.

노 당선자는 최근 재계가 집단소송제를 반대하자 “집단소송제는 허위공시, 부실회계 문제, 주가조작 등 3개의 부정행위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도입한다”면서 “집단소송제를 반대하겠다는 것은 3대 부정행위를 계속하겠다는 것이냐”고 말했다.

하지만 모 그룹 관계자는 “대북 비밀송금 사건은 허위공시와 부실회계로 주주에게 피해를 준 대표적인 사건인데 이런 일을 덮어버리고 재계를 무슨 논리로 설득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정경유착의 대표적인 사례인 이번 사건을 노 당선자가 어떻게 처리하는지가 앞으로 재벌정책의 시금석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김 소장은 “‘통치행위’인지 ‘대북사업의 일환’인지 진실을 밝히고 책임 추궁이 이뤄져야 한다”면서 “민족적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불투명한 대북사업이 용인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금감위 관계자는 “유독 현대만이 정경유착의 표적이라고 보지는 않는다”면서 “기업은 늘 수익을 찾아 새로운 사업을 추구하고, 신규 진입에는 대부분 이권에 따라붙기 때문에 정경유착의 가능성은 항상,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새 정부가 대북 비밀송금 사건을 적당히 덮는다면 정경유착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인 셈이다.

임규진기자 mhjh22@donga.com

김동원기자 daviskim@donga.com

천광암기자 iam@donga.com

▼"현대 北송금 2000년 3월 계약"▼

현대그룹이 대북 송금과 관련해 2000년 3월17일 북한과 계약서를 썼으며 이 자리에는 박지원(朴智元·현 대통령비서실장) 당시 문화관광부장관이 있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내일신문 7일자 보도에 따르면 고 정주영(鄭周永) 현대 명예회장과 절친하게 지냈던 한 경제계 원로는 “정 회장이 대북 교류 대가로 5억달러를 주기로 최종 합의하고 계약서를 체결한 것은 2000년 3월17일이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합의서를 체결하는 자리에 북측에서는 송호경(당시 조선아태협력위원회 부위원장) 황철(아태위원회 실장), 현대측에서는 정몽헌 현대아산이사회 회장, 박지원 장관 등이 참석했다는 것을 정 회장이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이 원로는 정 회장의 말을 빌려 “당초 북측에서 요구한 금액은 10억달러였으나 밤새 절충한 끝에 5억달러에 합의했다”고 덧붙였다.

경제계 원로가 전한 대로 당시 정몽헌 회장뿐 아니라 박 장관이 참석해 금액을 조정하고 계약까지 했다면 대북 송금은 ‘현대의 대북사업 독점권 대가’일 뿐 아니라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뒷거래 성격이 있었다는 풀이가 가능하다.

이 인사는 그전에도 정 회장의 말을 빌려 “현대측에서 총 5억달러를 북한에 보냈으며, 그중 1억달러가 제때 입금되지 않아 정상회담이 하루 늦춰졌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한편 박 비서실장은 이에 대해 “전혀 사실이 아니다”고 부인했다.

이강운기자 kwoon90@donga.com

▼정경유착-관치경제 없애려면▼

정경유착과 관치경제는 한국이 고도성장을 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부산물이었다는 주장도 적지 않지만 이를 시급히 개선해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한보 사태’가 97년 외환위기의 신호탄이 되면서 정경유착의 폐해가 얼마나 큰지에 관해서도 국민적인 공감대가 이뤄진 상태다.

전문가들은 정경유착과 관치경제를 뿌리뽑기 위해서는 시장경제 원칙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기업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고 부당내부거래를 없애려는 노력도 함께 이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남대 김영용(金永龍·경제학) 교수는 “정경유착에는 기업의 책임도 있지만 정부가 규제권한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근본 원인”이라면서 “정부가 과도한 권한을 갖고 있는 한 누가 정권을 잡든 정경유착은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작은 정부와 자유시장경제를 지향하면 기업이 정부와 유착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된다”고 덧붙였다.

경희대 안재욱(安在旭·경제학) 교수도 “정부가 각종 인허가권이나 독점사업 허가권을 갖고 있으면 기업은 로비 유혹을 느낀다”면서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구조를 만들어 놓으면 정경유착은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경제부처의 한 국장급 간부도 “정부의 권한을 최소화하는 것이 정경유착을 없애는 지름길”이라며 “불가피하게 남겨둬야 하는 규제는 원칙을 분명히 해 기업이 로비할 여지를 없애야 한다”고 밝혔다.

일부 대기업이 금융회사를 사금고처럼 이용하는 것도 문제지만 정부가 은행을 지배하는 관치금융도 큰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김 교수는 “정부가 금융기관 경영과 인사에 개입할 수 없도록 주인을 찾아줘야 한다”고 말했다. 안 교수는 “산업은행도 민영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려대 장세진(張世進·경영학) 교수는 “정경유착을 없애려면 기업경영에 관한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돼야 한다”며 “재계도 증권관련 집단소송제 등 투명성을 강화하기 위한 개혁조치를 반대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관치경제에 따른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정부를 견제할 수 있는 국회의 권한과 능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천광암기자 iam@donga.com

▼선진국선 회계부정 어떻게 처리하나▼

현대상선, 현대전자, 현대건설 등 현대 계열사들의 대북 비밀송금 사건은 기업경영의 측면에서 보면 기업자금을 빼돌리고 이 사실을 분식회계로 감추어 주주들에게 피해를 끼친 중대한 사안이다.

그런데도 이번 사건에 연루된 현대그룹 관계자들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고 정부는 진실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기업의 회계부정 사실이 드러나면 회사가 문을 닫고 경영진과 회계사들이 줄줄이 법적 처벌을 받는다.

2001년 말 미국 최대 에너지회사인 엔론이 파산하면서 회계부정 파문이 일었던 미국에서는 지난해에도 통신회사인 월드컴과 글로벌크로싱 등이 나란히 거액의 회계부정이 드러나 문을 닫았다.

이들 기업의 최고경영진은 잇따라 기소됐으며, 엔론 월드컴 글로벌크로싱 등의 회계감사를 맡았던 아서 앤더슨도 몰락했다.

외국계 증권사의 한 임원은 “한국도 회계부정이 드러난 기업과 회계법인에 대한 제재규정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지만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 것이 문제”라며 “미국에서는 회계장부 조작을 눈감아 주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현대상선은 대북사업 자금으로 2억달러를 북한에 송금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현대아산이 주체인 대북사업을 위해 현대상선이 기업 자금을 사용했다면 주주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끼친 셈이다.

외국에서는 힘이 약한 소액주주들이 대주주나 기업에 맞서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도록 증권집단소송제를 도입하고 있다. 한국은 아직 이 제도를 도입하지 않았다.

1938년 집단소송제를 도입한 미국의 경우 1973∼91년 제기된 집단소송 가운데 증권집단소송이 8463건으로 17.4%를 차지해 ‘소비자권익 침해에 따른 집단소송’ 다음으로 많았다.

신치영기자 higgl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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