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정부는 김 대통령이 베를린선언에서 ‘획기적 대북지원 용의’를 밝힌 데 대해 북한이 화답함으로써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됐다고 설명해 왔다.
그러나 베를린선언 직전인 3월 8부터 10일까지 박지원(朴智元) 당시 문화관광부장관과 송호경(宋浩景) 북한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이 비밀 접촉을 했다면 베를린선언 자체가 밀실협상의 산물이었을 가능성이 짙어진다.
더욱이 싱가포르 박-송 비밀접촉 현장 주변에 정몽헌(鄭夢憲) 당시 현대그룹 회장과 이익치(李益治) 현대증권 회장이 대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베를린선언 시점부터 현대가 핵심 역할을 했음을 시사한다.
정부는 그동안 베를린선언 이후 중국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예비 접촉을 했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싱가포르 비밀접촉만큼은 극구 부인해 왔다. 박 비서실장은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싱가포르 비밀접촉 여부를 추궁하는 의원들의 질의에 대해 “2000년 3월 8일부터 10일까지 휴가차 싱가포르를 방문했으나 북한 사람은 만나지 않았다”고 강력 부인했다.
이는 베를린선언을 1, 2일 앞둔 시점에서 남북이 비밀접촉을 했다면 베를린선언의 ‘순수성’이 의심을 받을 뿐 아니라 베를린회담이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잃기 때문으로 보인다. 싱가포르 비밀접촉 상황은 당시 독일을 방문 중이던 김 대통령에게도 즉각 보고됐을 것이 틀림없어 싱가포르 비밀접촉과 베를린선언의 관련성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박 비서실장은 요시다씨의 증언에 대해 이날 “그런 문제에 대해 개별적으로 답변하고 있지 않다”며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윤승모기자 ysmo@donga.com
▼요시다 증언요지▼
현대의 금강산 사업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재일본조선인총연합(총련)계 사업가 요시다 다케시(吉田孟·55)는 2000년 3월 초 박지원(朴智元)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과 북한의 송호경 조선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이 싱가포르에서 협상을 갖도록 주선했다고 13일 밝혔다.
요시다씨는 “날짜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2000년 3월 초 싱가포르 협상 준비를 해준 것은 사실”이라면서 “당시 나와 정몽헌(鄭夢憲) 현대그룹 회장, 이익치(李益治) 현대증권 회장도 싱가포르에 있었으나 협상장에는 들어가지 않았다”고 이날 측근을 통해 밝혔다. 북-일 무역 중개회사 신니혼산교(新日本産業) 사장인 요시다씨는 싱가포르 남북협상에 이어 중국 상하이(上海) 베이징(北京)에서 이루어진 후속 협상 일정 등을 정하는 일도 도왔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현대의 대북 비밀송금에 관여했을 것이라는 일부 정치권의 의혹 제기에 대해서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면서 “중개자로 양측 만남을 주선하는 역할을 했을 뿐 협상 내용이나 돈 이야기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측근을 통해 전했다. 요시다씨는 1998년 2월 중국 베이징에서 정 회장과 송 부위원장의 만남을 주선하는 등 금강산 관광사업의 ‘파이프’ 역할을 해온 인물. 부친은 함경도 출신이며 현재는 일본에 귀화한 상태이다. 2001년 이후 대북 창구로서의 존재가 드러난 뒤로는 무역에만 전념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도쿄=조헌주특파원 hanscho@donga.com
▼요시다는 누구…▼
요시다 다케시(吉田孟·55)는 총련계 재일동포 2세 출신으로 일본에 귀화했으며 북한과 일본의 무역중개업을 하는 신니혼산교(新日本産業) 사장이다.
함경도 출신인 선친이 김일성(金日成) 주석과 절친했던 인연을 발판 삼아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남북 막후협상을 중개하는 등 한국과 일본의 대북 창구역을 하고 있다.
현대의 금강산 관광사업 추진과정에서도 그는 현대와 북한을 연결해 줬다. 조선 아태평화위 송호경(宋浩景) 부위원장, 황철(黃哲) 참사를 현대에 소개했으며 고 정주영(鄭周永) 현대 명예회장과 김 위원장의 면담도 주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승모기자 ysmo@donga.com
▼박지원 비서실장 싱가포르 방문 의혹에 대한 발언록▼
박지원 대통령비서실장 싱가포르 방문 의혹에 대한 발언록(요약)
▽국회 운영위 대통령비서실 국정감사(2002.10.5)
박 비서실장=(싱가포르에 무슨 일로 갔느냐는 이주영 한나라당 의원의 질문에 대해) 싱가포르에 간 것은 2000년 3월8일부터 10일까지로 비서관 한명만 데리고 휴가를 갔다 왔다. 특별히 만난 한국 사람도 없고, 물론 북한 사람도 없다. 휴가원도 내고, 대통령과 국무총리에게는 구두보고를 하고 갔다 왔다.
▽국회 운영위 대통령비서실 소관 세출예산심사(2002.10.23)
박 비서실장=(싱가포르는 휴양지가 아니며, 그곳에서 북한쪽에 돈을 보낸 것이 아니냐는 이규택 한나라당 의원의 질문에 대해) 싱가포르는 휴양지다. 바닷가에 가보면 좋은 바닷가재 식당도 많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어떤 송금도 한 적이 없다. 저도 인격을 가졌고 애국심도 있다. 답답하고 억울하다.
심규선기자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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