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만 빚은 제2건국위 무엇이 문제인가

  • 입력 2003년 2월 14일 18시 15분


▼인수위, 폐지 검토▼

김대중(金大中) 정부 초기 ‘민족 화합과 세계 일류 국가 건설을 위한 범국민 운동 추진’이라는 거창한 목표를 내걸고 대통령 자문기구로 출범한 제2건국위원회가 정부 주도 국민운동의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낸 채 폐지될 ‘운명’에 놓였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당선자가 최근 제2건국위 활동을 실패한 것으로 규정한 데 이어 대통령직인수위원회도 이의 폐지를 검토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범 당시 단체의 성격과 활동 영역 등을 둘러싸고 시민단체와 야당의 거센 비난을 받은 제2건국위는 정부의 지원 아래 광대한 조직을 갖췄으나 활동의 모호성과 조직의 정체성 부족 등으로 지난해부터 사실상 활동이 중단된 ‘식물조직’이나 다름없는 상태다.

▽태생적 한계=박지원(朴智元·대통령비서실장) 당시 대통령공보수석비서관은 1998년 10월 위원회 출범 당시 “제2건국위는 앞으로 제2의 건국에 필요한 제도, 의식, 생활개혁 등 3대 개혁운동을 스스로 추진하거나 민간부문의 운동을 지원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2건국위의 설립은 준비작업부터 민간을 배제한 채 철저히 청와대 주도로 진행됐다.

준비 작업을 총괄한 이강래(李康來) 당시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은 위원회 출범 후에도 위원회 핵심조직인 상임위원회와 기획단의 부단장을 맡아 기획단장이었던 김정길(金正吉) 당시 행정자치부 장관과 함께 위원회 활동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특히 출범 당시 상임위에는 행자부 재정경제부 교육부 등 주요 부처 장관들과 주요 대통령수석비서관들이 참여했으며, 기획단에는 정부부처 차관급 인사들을 포함해 김 대통령의 자문역할을 했던 소장파 교수들이 대거 포진했다. 당시 기획단 참여 인사의 80%가 공무원이었다.

김 대통령도 “제2건국 운동에서 공무원의 의식개혁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공무원은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말해 공무원의 위원회 가입이 가속화됐다.

하부조직인 전국 252개 지방추진위원회의 경우 행자부가 지방자치단체를 독려해 행정부시장, 구청장, 군수, 광역의회 부의장 및 상임위원장, 교육청 부교육감, 경찰서 경무과장, 교육청 학무과장 등이 당연직 위원이 됐다.

또 친정부 성향인 지방의 기업인이나 유지들에 대해서도 가입을 독려했다. 이 때문에 전국적으로 9000여명의 위원을 둔 지방추진위는 지방의 실력자와 유지들의 모임으로 변질됐다.

여기에 서영훈(徐英勳) 제2건국위 위원장이 여당인 새천년민주당 대표가 되고 이만의(李萬儀) 위원회 기획운영실장과 최인기(崔仁基) 위원이 각각 대통령공직기강비서관과 행자부 장관으로 발탁되는 등 위원들이 정부 여당으로 옮기면서 ‘제2건국위는 청와대 외곽조직’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확산됐다.

▽활동 목표의 모호성=제2건국위는 출범 당시 참여민주주의 실현, 사회정의 실현, 보편적 세계주의 구현 등 7대 국정과제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같은 ‘뜬구름 잡기’ 식의 거창한 구호를 실행할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전혀 만들지 못했다. 위원회가 전개한 교통법규 지키기, 양보운전하기 등 ‘기본 바로 세우기 운동’은 이미 일반 시민단체 등에서 하고 있는 활동이어서 주목을 끌지 못했다.

또 출범 초기 제2건국위의 중앙위원회는 정부개혁 및 민원행정 개선 방안을 토의하는 등 공공개혁작업을 주도하려는 인상을 풍겨 민간운동이 아닌 새로운 권력기관으로 변질되는 것이 아니냐는 비난을 받았다.

이는 위원들조차 제2건국위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우왕좌왕한 케이스의 하나로 꼽힌다.

공무원과 관변 인사들이 중심이 된 지방추진위 위원들도 자발적인 참여가 부족해 변변한 캠페인 활동조차 하지 못했다.

지방추진위의 한 위원은 “1∼2개월에 한번씩 세미나나 교육 명목으로 모여 식사를 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활동이었다”며 “모임은 공무원들을 중심으로 정부 시책을 옹호하는 발언이 이어지고 나머지 민간위원들은 그저 듣기만 하는 식으로 진행됐다”고 말했다. 실제 위원회가 4년간 쓴 120여억원의 예산 대부분은 세미나와 교육비용으로 지출됐다.

그나마 이 같은 활동도 정권 말기로 접어든 지난해부터 위원들이 모임 자체를 꺼려 중단된 상태다.

위원회 업무를 담당했던 한 공무원은 “시민들의 의식이 성숙된 시대에 정부가 국민운동을 주도하고 통제하려는 시도 자체가 난센스였다”고 지적했다.

이현두기자 ruchi@donga.com


▼산파역 이강래 前수석▼

‘제2의 건국 운동’ 구상은 김대중(金大中) 정부 임기 초인 98년 당시 대통령정무수석이던 민주당 이강래(李康來) 의원의 아이디어였다.

이 의원은 14일 “처음에는 김영삼(金泳三) 대통령 시절의 ‘세계화추진위원회’와 비슷한 형태의 대통령 자문기구를 생각했는데, 이게 국민운동 방식으로 바뀌면서 여러 오해를 받게 됐다”고 토로했다.

―제2의 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를 발족하게 된 배경은….

“98년 5월 청와대에 들어간 뒤 50년 만의 정권교체, 외환위기 극복 등의 의미를 담은 새 정부의 슬로건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를 대통령에게 보고했더니 ‘나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며 구체적으로 추진해 보라고 했다.”

―왜 운동본부 형태로 바뀌게 됐나.

“한번은 청와대에서 토론 기회가 있었는데, 김 대통령이 제2건국위를 운동본부 형태로 추진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갖고 왔다. 누가 작성한 것인지는 지금도 모른다. 이런 유의 운동을 대대적으로 관(官)이 주도하는 시대는 끝났다며 곤란하다고 설득했지만 대통령은 물러날 태세가 아니었다.”

―정치권 시민단체 등의 반응이 비판적이었는데….

“시민단체와의 협력을 위한 네트워킹 방법을 생각했는데, 시민단체는 이를 ‘어용화’ 시도로 이해한 것 같다. 한나라당은 신당 창당 의도라며 반대했다. 정무수석이 주도하니까 더 그런 오해를 받았던 것 같다.”

―제2건국 운동을 어떻게 평가하나.

“순수한 의도로 시작했는데 폄하되고 난도질됐다. 물론 대통령도 다른 ‘정략적’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국민운동 방식이 아니라 개혁의제를 개발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확산하는 정도로 추진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정용관기자 yongari@donga.com

▼서경석 前 경실련 총장▼

“제2건국위윈회의 국민운동은 정부가 주도하는 제2의 새마을운동으로 전락했습니다.”

서경석(徐京錫) 전 경실련 사무총장은 14일 “1998년 10월 제2건국위 출범 직전 상당수의 시민단체들이 정부 주도의 관변단체가 아니라면 참여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며 “그러나 이 위원회가 관 주도로 구성돼 참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40여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한국시민단체협의회 사무총장이었던 서 전 총장은 “당시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라는 국난을 맞아 생존차원에서 개혁 운동이 필요하다고 보고 처음에는 시민단체들이 이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한 논의를 벌이고, 단체 대표들이 정부측 인사들과 비공식 세미나를 갖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막상 제2건국위가 출범하면서 그 조직이 너무 방대한 데다 개혁주체가 국민이 되는 방향으로 조직이 운영돼야 한다는 시민단체의 요구가 전혀 반영되지 않아 시민단체들이 외면하게 됐다는 것.

서 전 총장은 “특히 제2건국위에 공무원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는 것이 정부가 운동을 주도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져 부정적인 인상을 주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그후 제2건국위 활동은 시민단체들의 관심에서 완전히 멀어졌고, 정부측에서도 시민단체를 끌어들이려는 노력을 더 이상 기울이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박원순(朴元淳) 참여연대 상임집행위 위원장은 “제2건국위가 차라리 기존의 잘하고 있던 시민단체를, 자율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지원하는 기구로 활동했더라면 바람직했을 것”이라며 “시민운동은 자율성이 생명인데 정부 지원이 끊기면 아무 것도 못하는 조직이 무슨 일을 이룰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김성규기자 kim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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